동피랑의 벽화
사랑을 지키다
박시하
수박을 들고 커다랗고 짙은 수박을 들고
붉은 물이 가득 든 초록 수박을 들고
삶보다 무거운 수박을 들고 땡볕 아래 걸었네
오래 걸었네 뜨거운 길을 걸었네
짙고 푸른 껍질을 쪼개면 시월할까
그 붉은 물은 달고 시원할까
멀고 먼 수박 껍질 속의 세계를 향해 걸었네
던져버릴 수 없어 떨어뜨릴 수도 없어
둥글고 커다란 수박은 깨져버릴 테니까
짙고 푸르지만 수박의 껍질은 연약하고
내 팔은 가늘고 등은 굽었다
터벅터벅 걸었네
멀고 먼 길 끝이 기억나지 않는 노란 길을
달콤하고 붉고 무거운 그대와
아!가겠소 난 가겠소 저 언덕 위로
목이 마르지 않았네 눈물이 흘렀네 멀고 먼
지워지고 말 꿈에서
-박시하 시집 『눈사람의 사회』
*
수박을 들고 가는 그 순간을
사랑으로 저리 아름답게 표현해 낼 수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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