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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계단/이선욱

kiku929 2015. 11. 16. 01:28

 

 

 

 

                                                                                                       photo by    윤가영

 

 

 

공중계단

 

 

이선욱

 

 

이 계단은 좀처럼 끝나지 않지만

아래로 내딛는 발소리는

갈수록 캄캄해지네

그늘처럼 말없는 걸음을 따라

한 단 한 단 줄어드는 공간의 동심원

 

그것도 조만간에는 멎으리라

그때쯤이면 또다른 발소리가

뒤를 따라 내려오겠지

그것이 이 계단의

유일한 고독이자 환상이므로

 

문득 허공의 저편이 떠오른 것도

그런 고독의 일부였을까

명멸하는 빛과 유령들의 아지트

뒤를 돌아보면

즉시 소멸하고 마는 세계

 

그러니까,

나의 쓸쓸한 체중이

계단과 계단 사이를 어둡게 낙하할 때

또다른 발소리가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계단을 울리는 겹겹의 파장과 함께

생각의 정적을 무너뜨리는

저 침울한 구두의 주인공

 

차라리 그것이 맨발이었다면

이 계단은 더 생생했을까

돌보다 더 단단한 감각이었을까

다만 그 또한 층층이 흐려졌을 테지

어느 곳이나 그 정도 질서는

존재하기 마련이니

 

내가 이 계단을 내려서기 전에도

수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어두워졌으리라

그리고 여전히 일정한 간격으로

서로의 뒤를 따르고 있겠지

절대로 돌아보지 않으며,

언제부터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이 계단의

유일한 고독이자 환상이므로

 

가끔 한 걸음이

천 걸음을 걸어내려가네

걸음이 항상 나와 동행하지는 않지만

멀어진 친구여,

고독도 어쩌면

그런 간격으로 이루어지겠지

물리적이면서도 심리적인 거리

따라가면서도 도무지 따라잡을 수 없는

이 평범한 역설을

 

탄탄하게 증명하려는 따위의

시작은 아니었으니

한편으로는 끝간에 다다를

무엇도 아니었으리라

무거운 체념으로 들어섰으리라

 

여기 그 무엇도

 

언젠가 저 발소리가 사라질 때쯤이면

나는 또 문득 허공의 저편을 생각할 것이고

지금보다는 조금 더 어두운 곳에서

눈을 감고 뛰어내려가듯 캄캄한,

캄캄한 진심으로 바랄 거야

이 계단이 영원히 지루하기를

 

발소리는 끊임없이

뒤이어 내려올 테지만

그 울림도 갈수록 흐리게 시작하겠지

그러면 어디쯤인가부터는

저절로 깨닫지 않을까

릴레이처럼 이어지고 소멸하는 발소리

그것이 왜 이 계단에 존재하고

또 존재해야 하는지

 

그렇지만 또 인정할 수 있을까

어두워진다는 것 그리고

자각한다는 것

순전히 걸음만으로

추억 같은 거 뒤돌아보지 않고도

그게 정말 가능한 일일까

 

질문은 슬픔을 잇지만

무던히 두고봐야겠지

여기 불필요한 선택의 여지는 없으니

이렇게 내려가거나 어두워질 뿐

발밑에 차례로 놓인 계단을 밟을수록

정말이지 이 거대한 성은

어디론가 계속 상승하는 느낌이라네

 

 

 

-이선욱 시집『탁,탁,탁』 /문학동네,2015

 

 

 

 

 

 

*

"발밑에 차례로 놓인 계단을 밟을수록

정말이지 이 거대한 성은

어디론가 계속 상승하는 느낌이라네"

 

마지막 연에 이르면 계단의 모습은 마치 괴물처럼 느껴지게 된다.

 

 

 

**

 

계단에서는 유독 소리만 두드러진다.

형체에 의해서가 아닌 소리에 의해서 존재되는 곳,

존재역시 소리에 의해 증명된다.

그리고 그 소리는 멀리서 희미하게, 또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기도 한다.

행렬을 이으며... 유령처럼.

멀어지고 가까워지는 그 모두가 저런 식으로 왔다 가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삶이란 것은 자꾸만 공중으로 부양하려는 속성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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