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마지막 무개화차 / 허연

kiku929 2015. 12. 24. 08:58

 

 

                                                                                                                        동피랑에서

 

 

 

 마지막 무개화차

 

 

   허연

 

  남자는 사랑이 식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 신전 기둥에 모든 새들의 머리가 자신의 사랑을 경배하도록 새겨놓았다. 지혜롭다는

새들의머리는 수천 년 동안 욕망을 마주했지만, 세월이 그것보다 먼저 욕망을 반박했다. 남자는 울부짖었지만 여자는 사하라의

먼지가 되어갔다. 파이터였던 남자는 더 많은 기둥을 세우다 미쳤고, 서풍을 따라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폐허의 불문율이 있다. 묻어버린 그 어떤 것도 파내지 말 것. 폐허 사이로 석양이 물처럼 흐를 때 속수무책으로 돌아올 것

 

  오늘 밤 모래바람이 등고선을 바꾸고

  사막여우 한 마리가

  사람들이 버리고 간 콜라 병을 핥는다

 

  살아 있는 자들은

  인생을 생각하는 내내 힘이 빠진다

  마지막 무개화차가 지나간다.

 

- 허연 시집『내가 원하는 천사』 / (문학과 지성사) 2012

 

 

 

 

 

*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

교회를 다니지 않는 나는 크리스마스라는 의미보다는해의 지난날을 돌아보는 날이 된다.

올해 나에게 가장 큰 변화는 시를 공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그것은 시를 한번 써보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왜라든지 무엇때문이라든지 하는 질문은 하지 않기로 했다.

시는 그런 질문앞에서는 별로 해줄 말이 없기 때문이다.

 

살아있다는 것이 미래와 연결되지 않으면 생기를 잃게 되는 것 같다.

살아는 있으되  점을 찍듯이 방향없이 흩어지는 나날들이라면 암울한 일이다.

내가 너무 비관적인 것인지 모르지만 지금 우리 사회의 앞날이 잘 보이지 않는다.

시에서처럼 '인생을 생각하는 내내 힘이 빠지'는 그런 날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끝내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 또한 삶이려니...

살아가는 일이 우울해도 순간순간의 아름다움은 도처에 널려있다.

나는 그 아름다운 것들에 눈길을 주며 산다.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 / 강미정  (0) 2015.12.25
폭설 / 공광규  (0) 2015.12.24
여름 신림동 / 이규리  (0) 2015.12.19
편지 / 허연  (0) 2015.12.16
배구/ 고형렬  (0) 2015.1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