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너무 오래된 이별 / 김경주

kiku929 2016. 4. 7. 22:20







너무 오래된 이별



김경주



불 피운 흔적이 남아 있는 숲이 좋다

햇볕에 그을린 거미들 냄새가


부스러기 많은 풀이 좋다 화석은 인정이 많아

텅 빈 시간에만 나타난다 그 속에 누군가 잠시 피운

불은 수척하다


네가 두고 간 운동화 속에 심은 벤자민이 좋다

눈을 뜨면 나는 커다란 항아리로 들어가 구르다가

언제나 언덕 앞에서 멈춘다


고요로 가득한, 그러나 텅 빈 내 어미(語尾)들이 좋다

벽지 속에 사는 기린의 목처럼


철봉에 희미하게 남은 손가락 자국이, 악력이 스르르

빠져나가던 침묵이 좋다 내가 어두운 운동장이라서

너는 엄지를 가만히 내 입속에 넣어주었다



-김경주 시집『고래와 수증기』中 / 문학과 지성사,2014






김경주 시인의 시 중에서 좋아하는,

특히 마지막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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