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내 속의 여자들 / 나희덕

kiku929 2010. 8. 3. 01:54

 

                           

 

 

 

 

내 속의 여자들

                      

 

 나 희 덕

 

 

내 속에는

반만 피가 도는 목련 한 그루와

잎끝이 뾰족뾰족한 오엽송,

잎을 잔뜩 오그린 모란 두어 그루,

꽃을 일찍 피워 버려

이제 하릴없이 무성해진 라일락,

이런 여자들 몇이 산다

한 뙈기 땅에 마음을 붙이고부터는

그녀들이 뿌리 내려

내 영혼의 발목도 잡아 주기를,

어디로도 못 가고

바람 소리도 못 들은 체 살 수 있기를 바랐다

바람의 길은 너무 높거나 너무 낮은 곳에 있었다

어떤 날은 전지가위를 들고

무성해진 가지를 마구 쳐내기도 했다

쳐내면서 내 잎끝에 내가 찔리고

그런 날 밤에는

내 속의 뿌리들, 그녀들, 몸살을 앓고는 했다

다른 뜰에서 수십 송이 꽃들이

폭죽처럼 터지던 봄날

내 반쪽 옆구리에는 목련 한 송이 간신히 피어났다

오그린 모란잎 사이에 고여 있는

몇 방울 빗물은 쉽게 마르지 않았다

라일락의 이미 흩어진 향기 돌아오지 않았다

바람은 짐짓 모른 체하며 내 곁을 지나갔다

  

 

시집 『 그곳이 멀지 않다』(민음사,1997) 

 

 

 

 

내 속의 여자들...

 

천진한 여자, 상처입은 여자, 어린 여자, 늙은 여자

순결한 여자, 소심한 여자, 불구인 여자, 시들한 여자,

겁 많은 여자, 당돌한 여자, 슬픈 여자, 행복한 여자,

사랑스런 여자, 미워지는 여자...

 

너무도 많다.

너무나 많아 이 여자, 이럴까 하면 저 여자, 저럴까 한다.

그래서 언제나 내 마음은 이럴까 저럴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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