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504

첼로 / 채길우

전통의상을 차려입은 고산지대 아낙은말도 통하지 않는 여행객들에게자신이 키운 돼지를 팔려고 했다. 피부병 걸린 껍질이 들고 일어나문드러지고 변색된 돼지는허약하고 작았지만 아낙은 튼실하고 문제없음을 증명하기 위해앞발을 한데 붙들어 품에 들어 올린 후양 무릎으로 돼지 허리를 죄어 괬다 아낙이 돼지의 희멀건 배를한 손으로 쓰다듬어주고 돼지는 날 선 비명이 드리운그림자만큼 긴 울음을 터뜨려 거품 문 입으로부터 공명하는침이 질질 흘러내리는 동안 햇살을 등지고 서서현이 끊어진 채 풀풀 날리는빛과 털과 텁텁한 공기 이상하리만치 또렷하고 홀가분한이국적 선율의 여러가지 절망들이눈부시도록 투명해 먼 나라의 허기와 영원까지도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전망처럼낮고 오래 지속되는 듯했다.  [측광], 창비, 2023.       이 ..

!시 2024.07.16

원산 / 유진목

원산    유진목    원산으로 가는 열차에 올라혼자서 잠이 들었다 한 사람은 지키지 않을 약속을 하고한 사람은 약속을 따르는 것처럼 원산으로 가는 열차는 가득 차고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어디로든 이동하는 동안에는 잠이 쏟아진다창밖에는 눈이 쏟아지는 것처럼 깨어나면 낯선 이가 옆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원산으로 가요거기서 살아요 창문이 덜컹이는 방에 나란히 누워한 사람이 천장을 가리키면한 사람이 천장을 보는 것처럼 깨어나면 또 다른 이가 옆에 앉아 창에 기대어 졸고 있다 플랫폼에는 이불을 닮은 눈이 소복이 쌓여 있어저기 저 열차는 바람에 흔들리는 창문 같지 이불은 차고베개는 낮고 어느새 나타난 역무원이 호각을 불어새들이 멀리 흩어지는 것처럼 나는 원산행 열차에 올라잠이 들었다.            ..

!시 2023.12.25

무릎

무릎 장옥관 1. 새도 무릎이 있던가 뼈와 뼈 사이에 둥근 언덕이 박혀 있다 무릎을 꺾으니 계단이 되었다 끓는 줄도 모르고 무릎 끓은 일 적지 않았으리라 2. 달콤한 샘에 입 대기 위해 나비는 무릎을 끓는다 무릎을 접지 않고 어찌 문이 열리랴 금동부처의 사타구니 사이로 머리 내미는 검은 달 3. 사람이 사람의 무릎 끓리는 건 나쁜 일이다 4. 무릎이 다 닳아 새가 된 사람을 너는 안다 쌀자루를 이고 다니다 무릎이 다 녹은 것이다 나비처럼 너는 언덕을 넘고 싶다 검은 달을 향해 컹컹, 너는 짖어본다 - 2023년 9월 11일자 중앙일보, 《시상과 세상》에서

!시 2023.09.12

겨울의 끝 / 루이즈 글릭

겨울의 끝 END OF WINTER 루이즈 글릭 정은귀 옮김 고요한 세상 위, 새 한 마리 운다, 검은 나뭇가지들 사이로 홀로 깨어나. 너는 태어나고 싶어 했어; 나 너를 태어나게 해 주었지. 지금껏 내 비통함이 언제 너의 즐거움을 막은 적이 있었는지? 감각을 갈망하여 어둠과 빛 속으로 동시에 곤두박질치면서, 마치 네가 너 스스로를 표현하길 원하는 새로운 어떤 것인 듯, 모든 빛, 모든 생기 이것이 네게 어떤 대가를 치르게 하리란 걸 절대로 생각하지 못하고, 내 음성의 소리가 너의 일부분이 아닌 어떤 것임을 절대로 상상하지 못하고― 다른 세계에서 너는 그걸 듣지 못할 거야, 다시는 또렷하게 듣지 못할 거야, 새 울음이나 사람의 외침으로는, 또렷한 소리로는 듣지 못하고, 다만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메아리로..

!시 2022.12.26

정류장에서 / 문태준

정류장에서 문태준 언젠가 내가 이 자리에 두고 간 정류장 둥근 빗방울 속에 그득 괴어 있던 정류장 꽃피고 잎 지고 이틀 사흘 여름 겨울 내려서던 정류장 먼 데 가는 구름더미와 눈보라와 안개의 정류장 홀어머니 머리에 이고 있던 정류장 막버스가 통째로 싣고 간 정류장 - 문태준 산문집 에 수록된 시 * 정류장이라는 장소는 문태준 시인의 시 속에서 자주 등장한다. 그 시인에게는 깊이 각인된 장소로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는 참 쉽다. 그런데 저런 시를 막상 쓰려면 정말 쓰기 어렵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익숙한 시어지만 그 언어의 조합이 결코 익숙하지 않다. 뻔하지도 않다. 그러나 읽고나면 마음 한 쪽 자리에 눈물이 고이게 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읽을수록 좋은 시 자꾸 읽게 되는 시 정류장에 서있게 되면 ..

!시 2022.12.25

저녁별/사포

저녁별 사포 저녁별은 찬란한 아침이 여기저기에다 흩뜨려놓은 것을 모두 제 자리로 돌려보낸다. 양을 돌려보내고 염소를 돌려보내고 어린이를 그 어머니 손에 돌려보낸다 * 간결하면서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함축적으로 하고 있는 시인가. 마지막 연, '어린이를 그 어머니 손에 돌려보낸다'는 이 문장은 제자리, 결국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삶과 죽음까지도 의미하고 있으니 그 의미망은 또 얼마나 큰 것인가.

!시 2022.11.28

손등에 사슴/ 최서진

손등에 사슴 최서진 손등에 앉아 있는 사슴 불을 꺼도 사라지지 않는 사슴 긴 속눈썹이 젖어 흔들리는 사슴 눈 내리는 꿈을 지나서 사슴은 온다 저녁 하늘의 방향으로 수많은 사슴이 뛰어간다 사슴의 이마 위로 폭설이 쏟아진다 견딜 수 없이 사슴 저녁처럼 가만히 오는 사슴 까마득히 등이 멀어지는 사슴 희박한 사슴 돌아보면 손등에는 없는 사슴 아홉의 달빛이 박힌 사슴 무성하던 잎들이 숲을 빠져나갈 때 어지러운 사슴 찬 얼룩의 모양으로 외로움으로 사슴은 태어나지 약속에 늦지 않도록 깊어진다는 말이 더 깊어지도록 사슴이라는 말이 더 사슴이 되도록 이마 위로 뛰어드는 사슴을 만나면 돌이킬 수 없는 비가 내리지 차분히 사슴을 이해하게 되고 우리는 결연하게 사슴으로 달려 나가지 손등이 뒤집어지지 않도록 《시인수첩》 202..

!시 2022.10.26

시집 <<아침은 생각한다>> 중에서

오월 문태준 상수리나무 새잎이 산의 실내(室內)에 가득했다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간 오월가 소년과 바람이 있었다 왜가리가 무논에 흰 빛으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파밭에는 매운맛이 새살처럼 돋았다 유월 문태준 사슴의 귀가 앞뒤로 한번 움직이듯이 오동나무 잎사귀가 흔들렸다 내 눈 속에서 푸르고 넓적한 손바닥 같은 작은 언덕에 올라선 시간은 늦가을비 문태준 늦가을비가 종일 오락가락한다 잔걱정하듯 내리는 비 씨앗이 한톨씩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새와 물결 문태준 새는 물결을 잘 아네 새는 물결 위에 앉네 물결을 노래하네 오늘은 세개의 물결을 노래하네 물결은 하얗게 흔들리네 설백 (雪白) 문태준 흰 종이에 까만 글자로 시를 적어놓고 날마다 다시 머리를 숙여 내려다본다 햇살은 이 까만 글자들을 빛의 끌로 파 갈 것이니 내..

!시 2022.07.14

<아침은 생각한다> 外 2 /문태준

아침은 생각한다 문태준 아침은 매일매일 생각한다 난바다에서 돌아오지 않은 어선은 없는지를 조각달이 물러가기를 충분히 기다렸는지를 시간의 기관사 일을 잠시 내려놓고 아침은 생각한다 밤새 뒤척이며 잠 못 이룬 사람의 깊은 골짜기를 삽을 메고 농로로 나서는 사람의 어둑어둑한 새벽길을 함지를 머리에 이고 시장으로 가는 행상의 어머니를 그리고 아침은 모스크 같은 햇살을 펼치며 말한다 어림도 없지요, 일으켜줘요! 밤의 적막과 그 이야기를 다 듣지 못한 것은 아닐까를 묻고 밤을 위한 기도를 너무 짧게 끝낸 것은 아닐까를 반성하지만 아침은 매일매일 말한다 세상에, 놀라워라! 광부처럼 밤의 갱도로부터 걸어나오는 아침은 다시 말한다 마음을 돌려요, 개관(開館)을 축하해요! 그녀가 나를 바라보아서 문태준 그녀가 나를 바라보..

!시 2022.07.14

어항골목 / 안현미

고장난 가로등처럼 서 있는 사내를 지나 방금 도착한 여자의 어깨에선 사막을 건너온 바람의 냄새가 났고 이 도시의 가장 후미진 모퉁이에선 골목이 부레처럼 부불어올라 고장난 가로등처럼 서 있던 사내의 구두가 담기고 있다 첨범, 여자는 의족을 벗고 부풀어오른 골목으로 물소리를 내며 다이빙한다 꼬리지느러미를 활 발히 흔들며 언어 이전으로 헤엄쳐간다 주름잡는다 여자의 주름에선 언어 이전에 있는 어떤 어항에서 꺼낸 것 같은 언어가 버블버블 퐁퐁 투명한 골목을 유영한다 인간의 남자를 사랑하여 아낌없이 버렸던 모든 것들 이 버블버블 다시 태어난다 그사이 젖은 구두를 벗은 사내도 산소통을 부레처럼 달고 언어를 떠나온다 어항 골목 고장난 가로등엔 물고기 달이 커진다 퐁퐁 골목밖으로 여자의 의족이 폭죽처럼 떠오른다 ―안현미..

!시 2022.0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