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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로 / 채길우

전통의상을 차려입은 고산지대 아낙은말도 통하지 않는 여행객들에게자신이 키운 돼지를 팔려고 했다. 피부병 걸린 껍질이 들고 일어나문드러지고 변색된 돼지는허약하고 작았지만 아낙은 튼실하고 문제없음을 증명하기 위해앞발을 한데 붙들어 품에 들어 올린 후양 무릎으로 돼지 허리를 죄어 괬다 아낙이 돼지의 희멀건 배를한 손으로 쓰다듬어주고 돼지는 날 선 비명이 드리운그림자만큼 긴 울음을 터뜨려 거품 문 입으로부터 공명하는침이 질질 흘러내리는 동안 햇살을 등지고 서서현이 끊어진 채 풀풀 날리는빛과 털과 텁텁한 공기 이상하리만치 또렷하고 홀가분한이국적 선율의 여러가지 절망들이눈부시도록 투명해 먼 나라의 허기와 영원까지도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전망처럼낮고 오래 지속되는 듯했다.  [측광], 창비, 2023.       이 ..

!시 2024.07.16

원산 / 유진목

원산    유진목    원산으로 가는 열차에 올라혼자서 잠이 들었다 한 사람은 지키지 않을 약속을 하고한 사람은 약속을 따르는 것처럼 원산으로 가는 열차는 가득 차고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어디로든 이동하는 동안에는 잠이 쏟아진다창밖에는 눈이 쏟아지는 것처럼 깨어나면 낯선 이가 옆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원산으로 가요거기서 살아요 창문이 덜컹이는 방에 나란히 누워한 사람이 천장을 가리키면한 사람이 천장을 보는 것처럼 깨어나면 또 다른 이가 옆에 앉아 창에 기대어 졸고 있다 플랫폼에는 이불을 닮은 눈이 소복이 쌓여 있어저기 저 열차는 바람에 흔들리는 창문 같지 이불은 차고베개는 낮고 어느새 나타난 역무원이 호각을 불어새들이 멀리 흩어지는 것처럼 나는 원산행 열차에 올라잠이 들었다.            ..

!시 2023.12.25

무릎

무릎 장옥관 1. 새도 무릎이 있던가 뼈와 뼈 사이에 둥근 언덕이 박혀 있다 무릎을 꺾으니 계단이 되었다 끓는 줄도 모르고 무릎 끓은 일 적지 않았으리라 2. 달콤한 샘에 입 대기 위해 나비는 무릎을 끓는다 무릎을 접지 않고 어찌 문이 열리랴 금동부처의 사타구니 사이로 머리 내미는 검은 달 3. 사람이 사람의 무릎 끓리는 건 나쁜 일이다 4. 무릎이 다 닳아 새가 된 사람을 너는 안다 쌀자루를 이고 다니다 무릎이 다 녹은 것이다 나비처럼 너는 언덕을 넘고 싶다 검은 달을 향해 컹컹, 너는 짖어본다 - 2023년 9월 11일자 중앙일보, 《시상과 세상》에서

!시 2023.09.12

몰입 상태가 되려면...「도둑맞은 집중력 」 중에서

몰입 상태가 되려면 단일한 목표를 택해야 하고 그 목표가 반드시 자신에게 유의미해야 하고, 능력의 한계까지 스스로를 밀어붙여야 한다. - 명확하게 정의된 목표 선택 - 자신에게 의미있는 일 선택 -능력의 한계에 가깝지만 능력을 벗어나지는 않는 일 선택 * 며칠전 종이신문 구독을 신청했다. 되도록 인터넷을 멀리하기 위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다. 인터넷에 과하게 접속하고 있으면서도 마음 한 켠에 드는 죄책감을 내 자신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덜려도 했던 것 같다. 종이로 된 글은 내가 선택하며 읽을 수 있다. 골고루 한번에 볼 수 있다. 그러나 인터넷 창에서는 내가 원하는 것, 관심있는 것만을 거의 폭격 수준으로 들이댄다. 그걸 알면서도 클릭하는 나, 그런 나를 뭔가를 잃어간다는 상실감으로 ..

!글 2023.08.28

고레에다 히로카즈(是枝裕和) 감독

요즘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들을 계속 보고 있다. -지금까지 본 영화 - 지금부터 볼 영화 , , , 가족에 관해 계속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그의 작품들. 결코 자극적이지 않으면서 담담하게, 소품 같기도 한 그의 영화들은 끝나고 나서도 뭔가 쉽게 엔딩을 고하지 않는다. 대사 하나하나, 장면 하나 하나 허투루 지나가는 것이 없다. 그러면서 영상은 아름답고 평화롭다. 무거운 주제, 잔혹한 현실을 담은 이야기라고 해도. 그래서 더 먹먹하다.

2023.02.14

소나무와 대나무와 매화를 세한삼우(歲寒三友)

소나무와 대나무와 매화를 세한삼우(歲寒三友)라 한다. 겨울의 때의 세 벗이라는 뜻이다. 잘 알려진 대로 추사 김정희는 제주도에 유배를 당하여 지낼 때에 자신에게 서적들을 구해다 보내준 제자 이상적을 위해 세한도歲寒圖를 그렸다. 그림에는 초라한 집 한 채와 고목 古木 몇 그루가 전부다. 나무가 선 곳에 풀이 다 시들어 있어 겨울의 때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 그림의 한쪽에 추사 김정희는 《논어 論語》의 편의 구절인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 歲寒然後知松柏知後凋'를 썼다. 날이 차서 모든 것이 다 시든 때에 이르러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의미다. 제자인 이상적의 절조를 소나무와 잣나무에 견주어 칭찬한 것이다. -문태준 산문집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나무가 되지요》 (마음..

!글 2022.12.26

겨울의 끝 / 루이즈 글릭

겨울의 끝 END OF WINTER 루이즈 글릭 정은귀 옮김 고요한 세상 위, 새 한 마리 운다, 검은 나뭇가지들 사이로 홀로 깨어나. 너는 태어나고 싶어 했어; 나 너를 태어나게 해 주었지. 지금껏 내 비통함이 언제 너의 즐거움을 막은 적이 있었는지? 감각을 갈망하여 어둠과 빛 속으로 동시에 곤두박질치면서, 마치 네가 너 스스로를 표현하길 원하는 새로운 어떤 것인 듯, 모든 빛, 모든 생기 이것이 네게 어떤 대가를 치르게 하리란 걸 절대로 생각하지 못하고, 내 음성의 소리가 너의 일부분이 아닌 어떤 것임을 절대로 상상하지 못하고― 다른 세계에서 너는 그걸 듣지 못할 거야, 다시는 또렷하게 듣지 못할 거야, 새 울음이나 사람의 외침으로는, 또렷한 소리로는 듣지 못하고, 다만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메아리로..

!시 2022.12.26

'流'

水流花開 물이 흐르고 꽃이 핀다. 이 문장을 가만히 생각하면 '꽃은 흐르는 물에서 핀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물이 흐른다는 것은 시간이 쉼 없이 지나간다는 것이고 꽃이 피는 것은 지금 내 앞에서 피는 것이다. 강물은 같은 곳을 두번 지나가지 않는다. 흘러간 강물에 대해선 마음에서도 흘려보내주는 것, 그것을 인정하고 지금 이 시간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꽃피는 순간이 찾아오는 것이 아닐까. '流'라는 뜻을 가슴에 담아본다.

바람마음 2022.12.25

정류장에서 / 문태준

정류장에서 문태준 언젠가 내가 이 자리에 두고 간 정류장 둥근 빗방울 속에 그득 괴어 있던 정류장 꽃피고 잎 지고 이틀 사흘 여름 겨울 내려서던 정류장 먼 데 가는 구름더미와 눈보라와 안개의 정류장 홀어머니 머리에 이고 있던 정류장 막버스가 통째로 싣고 간 정류장 - 문태준 산문집 에 수록된 시 * 정류장이라는 장소는 문태준 시인의 시 속에서 자주 등장한다. 그 시인에게는 깊이 각인된 장소로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는 참 쉽다. 그런데 저런 시를 막상 쓰려면 정말 쓰기 어렵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익숙한 시어지만 그 언어의 조합이 결코 익숙하지 않다. 뻔하지도 않다. 그러나 읽고나면 마음 한 쪽 자리에 눈물이 고이게 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읽을수록 좋은 시 자꾸 읽게 되는 시 정류장에 서있게 되면 ..

!시 2022.1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