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속의 여자들
나 희 덕
내 속에는
반만 피가 도는 목련 한 그루와
잎끝이 뾰족뾰족한 오엽송,
잎을 잔뜩 오그린 모란 두어 그루,
꽃을 일찍 피워 버려
이제 하릴없이 무성해진 라일락,
이런 여자들 몇이 산다
한 뙈기 땅에 마음을 붙이고부터는
그녀들이 뿌리 내려
내 영혼의 발목도 잡아 주기를,
어디로도 못 가고
바람 소리도 못 들은 체 살 수 있기를 바랐다
바람의 길은 너무 높거나 너무 낮은 곳에 있었다
어떤 날은 전지가위를 들고
무성해진 가지를 마구 쳐내기도 했다
쳐내면서 내 잎끝에 내가 찔리고
그런 날 밤에는
내 속의 뿌리들, 그녀들, 몸살을 앓고는 했다
다른 뜰에서 수십 송이 꽃들이
폭죽처럼 터지던 봄날
내 반쪽 옆구리에는 목련 한 송이 간신히 피어났다
오그린 모란잎 사이에 고여 있는
몇 방울 빗물은 쉽게 마르지 않았다
라일락의 이미 흩어진 향기 돌아오지 않았다
바람은 짐짓 모른 체하며 내 곁을 지나갔다
시집 『 그곳이 멀지 않다』(민음사,1997)
내 속의 여자들...
천진한 여자, 상처입은 여자, 어린 여자, 늙은 여자
순결한 여자, 소심한 여자, 불구인 여자, 시들한 여자,
겁 많은 여자, 당돌한 여자, 슬픈 여자, 행복한 여자,
사랑스런 여자, 미워지는 여자...
너무도 많다.
너무나 많아 이 여자, 이럴까 하면 저 여자, 저럴까 한다.
그래서 언제나 내 마음은 이럴까 저럴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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