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그 여름의 끝 / 이성복

kiku929 2010. 8. 31. 12:40

 

          

  

 

 

 

그 여름의 끝

 

 

이성복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우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올 해는 개심사의 배롱나무를 보지 못하고 여름을 보내려나보다.

하지만 그 백일홍 나무는 몇백년을 버텨온 지난 세월처럼 무사할 거라는 것을 안다.

 

이상하게 여름의 끝은 일년중 가장 차분해지는 계절이다.

퀴블로 로스 박사가 말한 죽음의 5단계가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이라 한다면

여름 끝의 계절은 어쩌면 타협에 해당되지 않을런지...

초록이 지쳐가는 계절, 그 초록도 머지 않았음을,

그래서 이별이란 어쩔 수 없음을 우린 여름 끝의 계절을 통해 미리 마음을 준비게 되는 건지도 모른다

 

이젠 백일홍 꽃들도 거의 끝물...

그 붉은 꽃들이 모두 지고 나면 올 봄 꽃으로 시작한 내 마음의 소란스러움도 함께 가라않을 것이다.

그리고 꽃과의 무덤덤한 이별을 끝내며 평온한 겨울 속으로 나 역시 함께 기나긴 동면에 들 것이다.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시 남자를 위하여 / 문정희  (0) 2010.09.17
전전긍긍 / 정끝별  (0) 2010.09.15
질투 / 김종미  (0) 2010.08.15
귀뚜라미 / 나희덕  (0) 2010.08.13
사랑할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 김재진  (0) 2010.0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