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그대 집 / 박정대

kiku929 2016. 5. 17. 14:29







그대 집



박정대



창포 강에 싸락눈이 내리는 오후

그대는 물을 긷고 나는 듣고 있었네

그대 발길에 스치는 조약돌의 음악 소리

아득한 산맥을 넘어온 시간들의 풍경 소리

내 마음이 가고 싶어하던 곳에서

오롯이 돋아나던 낮은 숨결의 불빛들

그 희미한 불빛의 계단을 살풋이 밟으며 내려오던

싸락눈, 싸락눈, 싸락눈의 和音

창포 강에 싸락눈이 내리는 오후

그대 물동이에 담겨

나 여기 그대 집까지 왔네

그대는 검은 천막에 사는 여인

오늘 저녁 그대는

또 한 줌의 쌀을 끓이네

저물어가는 창포 강가엔 아직도 눈이 내리는데

눈발 속으로도 또 다른 눈이 내리는데

천막 속의 고요, 고요 속의 음악

나는 끓고 그대는 웃네

희미한 호롱불 아래서

이제사 그대 입술 끝에 닿은

나, 고요한 한 잔의 창포 강



-박정대 시집 『아무르 기타』중 / 문학사상사






*

모처럼 박정대 시집을 펼친다

예전 이 시인을 많이 좋아했던 적이 있다. -물론 지금도 좋아하지만

그의 이국적인 언어들은 신비로운 공간감과 더불어 비현실적, 몽환적인 이미지를 던져 주는데

그 느낌이 참으로 낭만적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내가 이 시인에게 끌렸던 것은 이런 대책없는 낭만성이었을 것이다.

눈, 음악, 악보, 밤, 기타... 박정대 시 속에는 이런 어휘들이 반복적으로 사용된다.

시각과 청각의 이미지가  변주되면서 시를 지어나가고 있어서인지 그의 시집 한 권을 읽고 나면

기나긴 시 한 편을 읽은 것만 같다.


예전의 시집을 꺼내 읽으면서 내가 좋아했던 그 때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젊은 날 자주 듣던 팝송을 들으며 그 시절의 옛사랑을 추억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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