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있다 / 진은영

kiku929 2016. 6. 2. 11:38



 





있다



진은영

                                                                    

 

 

  창백한 달빛에 네가 나의 여윈 팔과 다리를 만져보고 있다

  밤이 목초 향기의 커튼을 살짝 들치고 엿보고 있다

  달빛 아래 추수하는 사람들이 있다

 

  빨간 손전등 두개의 빛이

  가위처럼 회청색 하늘을 자르고 있다

 

  창 전면에 롤스크린이 쳐진 정오의 방처럼

  책의 몇 줄이 환해질 때가 있다

  창밖을 지나가는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인 때가 있다

  여기에 네가 있다 어린 시절의 작은 알코올램프가 있다

  늪 위로 쏟아지는 버드나무 노란 꽃가루가 있다

  죽은 가지 위에 밤새 우는 것들이 있다

  그 울음이 비에 젖은 속옷처럼 온몸에 달라붙을 때가 있다

 

  확인할 수 없는 존재가 있다

  깨진 나팔의 비명처럼

  물결 위를 떠도는 낙하산처럼

  투신한 여자의 얼굴 위로 펼쳐진 넓은 치마처럼

  집 둘레에 노래가 있다

 

                                             


 - 진은영 시집『훔쳐가는 노래』중에서





*

있다, 없다,

이 두개의 단어는 존재를 설명하는 가장 적합한 동사이다.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거나, 있을지도 없을지도 모른다거나, 하는 말은

존재를 설명하는데는 부적합하다.

세상의 모든 사물의 존재는 그러므로 있거나 또는 없거나.


그러나

있다고도 없다고도 단정할 수 없는 그 틈에서 세상의 이야기는 시작이 된다.

설화나 동화나 민담이 그렇다.

그리고 모든 예술 또한 그곳에서 나온다.

마음은 시각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것에 기운다.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존재의 여부가 아니라 존재가 주는 감각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예술을 오감에 관한 기록이라고 말해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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