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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kiku929 2016. 8. 25. 22:44

죽음을 넘나든 사랑

오르페우스(Orpheus)는 아폴론과 칼리오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그는 아버지에게서는 리라 연주 재능을, 어머니에게서는 아름다운 목소리를 물려받았다. 리라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면 인간들은 물론이거니와 동식물들까지도 음악에 취해 세상의 모든 고통과 슬픔을 잊어버리곤 했다.

오르페우스는 숲의 요정 에우리디케(Eurydike)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결혼식 날 결혼의 신 히메나이오스(Hymenaios)가 들고 있던 축복의 횃불이 꺼져 피어오른 연기 때문에 하객들이 기침에 시달리는 불길한 징조가 일어난다.

불길한 징조는 곧 현실로 나타난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에우리디케는 들판으로 나들이 나갔다가 양치기 아리스타이오스(Aristaios)와 마주친다. 아리스타이오스는 에우리디케의 미모에 매료되어 덤벼든다. 겁에 질린 에우리디케는 필사적으로 달아나다가 풀밭에 숨어 있던 독사에 발을 물려 즉사하고 만다.

에우리디케의 죽음, Erasmus Quellinus(II), 1630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던 오르페우스는 졸지에 찾아든 엄청난 비극으로 바닥없는 비탄 속에 빠진다. 그는 음악으로 슬픔을 달래보려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마침내 그는 저승 세계로 가서 사랑하는 아내를 되찾아오기로 작심한다. 하지만 살아 있는 몸으로 저승 세계를 찾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그렇지만 산천초목까지 감동시키는 오르페우스의 음악이 이를 가능케 한다. 그는 저승으로 가는 길목을 지키는 뱃사공 카론과 삼두견 케르베로스를 음악의 힘으로 제압하고 마침내 저승의 주인인 하데스와 페르세포네 앞에 서게 된다. 그리고 아름다운 리라 반주에 맞춰 구성지게 노래를 부른다.

“언젠가는 누구든 올 수밖에 없는 저승 세계를 다스리는 신들이여! 저의 애달픈 사연을 들어주소서. 제가 이곳에 온 것은 타르타로스의 비밀을 캐기 위해서도 아니요, 입구를 지키는 머리가 셋 달린 개와 힘을 겨루기 위해서도 아니랍니다. 저는 오직 독사에게 발이 물려 행복의 정점에서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진 사랑하는 아내를 찾으러 왔을 뿐입니다. 사랑의 신 에로스가 저를 이곳으로 인도하였답니다. 사랑은 이승이건 저승이건 간에 모든 것을 지배하는 강력한 힘이라고 알고 있지요.

저승의 군주시여! 부디 에우리디케의 명줄을 다시 이어주십시오. 제발 그녀를 저에게 돌려주십시오. 만약 이 간절한 청을 거절하신다면 두 사람의 죽음 앞에서 승전가를 높이 부르소서.”

오르페우스의 아름답고 구슬픈 노래는 저승의 망령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끝없는 갈증에 시달리는 탄탈로스(Tantalos)는 물을 마시려는 행동을 멈추었으며(신들을 시험해 볼 목적으로 아들의 고기로 요리한 음식을 대접한 죄를 지어, 물을 마시려고 몸을 굽히면 그만큼 수면이 낮아지는 저승의 연못에 갇혀 영원한 갈증에 시달리고 있다), 익시온(Ixion)의 불 수레도 멈추었다(헤라를 넘본 죄로 영원히 멈추지 않는 불 수레에 묶여 있다).

다나오스(Danaos)의 딸들은 항아리에 물을 쏟아 붓는 일을 멈추었으며(신혼 첫날 밤 남편들을 살해한 죄로 밑 빠진 항아리에 끊임없이 물을 붓고 있다), 시시포스(Sisyphos)도 굴리던 바위를 멈추고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신들을 기만하여 죽음을 모면하려 한 죄로 온종일 큰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힘들여 끌어 올리는 노역에 처해진다. 그런데 바위가 꼭대기에 이르게 되면 다시 굴러 떨어져 제자리로 돌아가기 때문에 그의 노역은 끝없이 되풀이 된다).

지하 세계의 오르페우스, Jacquesson de la Chevreuse, 1863

하데스와 페르세포네 또한 무한한 감동을 받고 그의 청을 들어주기로 한다. 그런데 오르페우스에게 한 가지 조건을 내건다. 에우리디케를 뒤따라가게 할 텐데, 그녀가 저승을 완전히 벗어나기 전까지 오르페우스가 절대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르페우스가 앞서 가고 에우리디케가 뒤따르는 저승 이탈 행렬이 시작된다. 오르페우스는 인내심을 가지고 어두운 저승길을 묵묵히 앞장서 걷는다. 그러나 저승 세계를 벗어나기 직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뒤를 돌아보고 만다. 그 순간 에우리디케는 애처로운 눈빛을 남기며 저승 세계로 다시 끌려 들어간다. 오르페우스가 사라져가는 아내를 잡으려고 안타까이 팔을 내밀었으나 캄캄한 허공만 잡힐 따름이었다.

지하 세계에서 에우리디케를 데려오는 오르페우스, Jean-Baptiste-Camille Corot, 1861

에우리디케와 다시 한 번 헤어진 오르페우스는 혼신의 노력으로 저승 문을 두드리지만, 닫힌 문은 두 번 다시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실의와 비통에 빠진 오르페우스는 세상과 등진 채 은둔의 삶을 택한다. 이후 수많은 여인들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애를 태우지만, 에우리디케만을 마음에 담고 있는 오르페우스는 냉랭하게 외면한다. 여인들의 모욕감과 마음의 상처는 날로 커간다.

디오니소스 제전에 참여한 트라키아의 여인들이 실의에 잠긴 오르페우스를 발견하고 분노하여 돌을 집어 던진다. 그러나 돌들은 그가 연주하는 음악 소리에 힘을 잃고 발밑에 떨어져버린다. 그러자 여인들은 소리 높여 악을 써 음악 소리를 잠재우면서 돌을 던진다. 오르페우스는 무수한 돌에 몸이 찢겨 피투성이가 되어 쓰려진다. 광기에 사로잡힌 여인들은 그의 사지를 갈기갈기 찢고 머리는 리라에 박아 에브로스 강에 던져버린다.

오르페우스의 머리가 박힌 리라는 강물에 떠내려가면서도 슬픈 음악을 연주한다. 무사이 여신들은 찢어진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루고, 제우스는 그의 리라를 하늘의 별자리로 박아준다. 망령이 된 오르페우스는 저승으로 내려가 에우리디케와 다시 만나게 된다. 그들은 엘리시움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다정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사랑과 소유욕

산천초목과 저승 세계까지 감동시키는 음악의 힘, 죽은 아내를 쫓아 사지(死地)를 찾는 열애, 그리고 이러한 천재성과 변치 않는 사랑이 광란의 무리들에 의해 무참히 찢겨지는 아픔 등이 어우러지는 오르페우스의 비장한 이야기는 뭇 시인과 예술가의 혼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독일의 시인 릴케(R. M. Rilke)는 노작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에서 광란의 무녀들에게 찢겨지면서도 기어이 살아남는 천재의 예술혼을 찬양한다.

그네들이 제 아무리 엉겨 붙고 미쳐 날뛰어도
그대의 머리와 리라를 부셔버릴 무녀 어디 있으랴
그대 가슴을 향해 던져진 날카로운 돌멩이들도
그대 몸에 닿으면 모두가 부드러워지고 귀가 열리노라

복수심에 불붙어 그네들 기어이 그대를 찢어버렸지만
그대의 울림은 사자들과 바위들 안에 여전히 머물러 있다네
나무들과 새들 안에서도
거기서 그대는 지금껏 노래하고 있다네

19세기 프랑스의 작곡가 오펜바흐(J. Offenbach)는 오페레타 「지옥의 오르페」에서 오르페우스 신화를 익살극으로 패러디한 바 있다. 그는 이 작품에서 에우리디케를 바람난 유부녀로, 제우스와 하데스를 색녀에게 군침을 흘리는 경박한 신들로 묘사한다. 그가 이 신화를 희화적으로 묘사한 이유는 당시 프랑스 상류사회의 위선적이고 속물적인 분위기를 풍자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빠르고 경쾌한 리듬으로 연주되는 작품의 서곡은 ‘캉캉’춤으로 우리들 귀에 익숙한 곡이기도 하다.

오르페우스의 사랑 이야기는 영화로도 많이 제작되었다.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1959년 칸 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작인 프랑스 감독 마르셀 카뮈(M. Camus)의 「흑인 오르페」다. 무대는 광란의 카니발로 유명한 브라질의 리우. 약혼녀와 결혼을 앞둔 전차 운전수 오르페는 카니발을 구경 온 시골 처녀 유리디스를 만나 첫눈에 사랑을 느낀다. 기타 반주를 하며 부르는 오르페의 노래에 유리디스의 마음도 열리고, 광란의 삼바 리듬에 맞춰 두 사람의 사랑은 불꽃을 더해 간다.

그런데 유리디스에게는 복면을 한 정체불명의 스토커가 따라붙는다. 결국 카니발의 절정에서 유리디스는 스토커를 피해 달아나다가 감전되어 죽고 만다. 실의에 빠진 오르페는 심령술사를 찾아 기도하던 중 뒤에서 울려오는 유리디스의 목소리를 듣는다. 깜짝 놀란 오르페는 뒤돌아보지 말라는 그녀의 애원을 저버리고 몸을 돌린다. 그러나 유리디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늙은 심령술사가 유리디스의 목소리로 흐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실망한 마음으로 거리로 뛰쳐나온 오르페는 시체 안치소에서 유리디스의 시신을 찾아낸다. 그는 시신을 끌어안고 리우의 언덕을 오른다. 그때 광분한 약혼녀 일행이 꼭대기에서 달려 내려오며 두 사람을 향해 돌팔매질을 한다. 오르페는 돌 세례를 받고 유리디스의 시신을 안은 채 절벽 밑으로 굴러 떨어져 최후를 맞는다.

사랑의 기쁨이 큰 만큼 상실의 아픔도 크다. 특히 사랑의 절정에서 닥쳐오는 급작스러운 상실은 비극의 극치를 이룬다. 연인의 배신에 치를 떨기도 하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절망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큰 아픔은 죽음으로 인한 사랑의 상실일 것이다. 사랑이 사라지고 홀로 남은 이 세상은 빛을 잃어버린다. 사랑과 함께 있었기에 의미가 있었던 시간과 공간들은 갑자기 정지되고 텅 비어버린다. 다채롭게 반짝이던 주변의 색채들이 불현듯 암울한 회색빛으로 변해버린다. 음악과 새소리는 소음이 되고, 책은 휴지조각으로 바뀐다. 삶은 죽음이 된다. 죽음에 대한 동경심이 싹트고 커간다. 그래서 죽음을 따라가 사랑을 되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오르페우스의 이야기는 이러한 상실의 아픔을 절절하게 드러내고 있다.

감성이 풍부한 많은 시인과 예술가들이 오르페우스에게 연민과 동감을 품고 있는데 반하여, 냉철한 철학자 플라톤은 고개를 저으며 이의를 제기한다. 오르페우스의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소유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향연』에서, 죽음을 이긴 위대한 예술가 오르페우스는 “겁쟁이 악사”로 평가 절하된다. 이유는, 그가 참된 사랑을 위한 필수 조건인 자기를 버리는 희생을 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아드메토스(Admetos) 왕을 대신해 죽음을 택한 왕비 알케스티스(Alkestis)를 참사랑의 표본으로 대비시킨다.

죽음의 병을 앓고 있는 아드메토스는 그를 위해 대신 죽어 줄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신탁을 접한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를 위해 나서는 사람이 없다. 평소 입이 닳도록 충성을 맹세했던 신하도, 절친한 친구들도 선뜻 나서지 않는다. 부모마저도 고개를 돌린다. 그때 알케스티스가 나서 죽음을 자청한다. 그런데 영웅 헤라클레스가 나타나 그녀의 방문 앞을 지키다가 저승사자를 제압하고 그녀를 구원해 준다.

이에 비하면 오르페우스는 사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기는 고사하고 명줄을 움켜잡은 채 저승으로 가려고 잔꾀를 부린 겁쟁이요 욕심쟁이일 따름이라는 얘기다. 그래서 그는 목숨도 구하고 사랑도 얻는 알케스티스에 비하여 저승에서 아내의 그림자만 보고 돌아온 실패자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알케스티스를 아드메토스 왕에게 돌려주는 헤라클레스, Johann Heinrich Tischbein, 1780년경

사랑의 강렬한 에너지는 메마른 영혼에 불꽃을 당기고 창조의 샘물을 솟구치게 한다. 사랑에 빠지면 무미건조하고 무색무취하던 세상이 생명과 환희의 빛깔과 향기로 넘쳐흐르게 된다. 모두가 시인이 되고, 철학자가 되고, 예술가가 된다.

사랑의 강렬한 에너지는 이성을 마비시키고 마음의 눈을 멀게도 한다. 사랑이 옆길로 빠져 소유욕과 집착으로 흐르면 자신과 연인 모두를 파멸로 몰아간다. 질투심의 포로가 되어 벌이는 추잡하고 치졸한 복수극과 치정극은 ‘사랑’이라는 두 글자 앞에서 치를 떨게 하고 눈을 감게 한다. 사랑의 상실을 극복하거나 승화시키지 못하여 지나치게 방황하거나 죽음을 택하는 것 역시 소유욕을 넘어서지 못한 저급한 사랑일 것이다. 상실의 상처와 아픔을 염려하여 사랑을 기피하거나 사랑을 하되 깊게 빠지지는 않으리라 다짐하는 청춘이 있다면, 그 또한 비겁하고 가련한 인생이리라. 젊은 시절 사랑의 강렬한 에너지에 흠뻑 취해 보자. 그리하여 넘치는 에너지로 평생 마르지 않는 창조의 샘물을 솟구치게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