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동화의 세계 / 이재훈

kiku929 2017. 9. 10. 14:26





동화의 세계




이재훈




나무에 등을 기대고 있는 사내.

늘 땅을 딛고 서 있는 나무.

감상적인 게 죄가 되는 삶을 생각하지.

나무의 높이만큼 타오르는 물줄기.

화산이 폭발할 때처럼, 온 사위가 환한 봄날.

당신을 만났지.

당신이 내게 준 시큼한 절망들.

상스러운 말들이 줄지어 다니는 학교 앞.

어둠 속에서 오직 나무만이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지.

모든 사람들은 희미한 실루엣으로만 존재할 뿐.

나 또한 한낱 이 세계의 배경일 텐데.

배경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매일 동화 쓰는 시간을 맞이하지.

희미한 달이 낡은 뱃전을 어루만지며 다가오는데.


밤이 환상의 세계라면

저녁은 동화의 세계


저녁이 되면 광장에 사람들이 모이지.

광장의 사람들은 어떤 저녁을 매일 그리고 있을까.

하얀 치자꽃을 꺾어 어두워가는 책상 위에 두고

달금하고 앳된 향기와 함께 조금씩 늙어가는 시간.

풀어진 눈으로 넘어가는 해를 보는 시간.

늘어진 삶에 끼어든 늙은 햇살이 온몸을 휘감지.

나무에 몸을 기댄 자는 고독해지지.



-시집 『벌레 신화』중에서






<제 3회 한국서정시문학상 수상 소감>



크고 비밀한 일을 꿈꾸는 시를 위해



이재훈



  비가 온 날입니다. 바싹 말라붙었던 온 대지가 촉촉해졌고 공기는 더욱 청명해졌습니다. 한바탕 쏟아지고 나니 모든 사물들이 상쾌합니다. 이런 느낌을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늘 꿉꿉하고 답답하고 풀이 죽은 모습만 눈에 보였습니다. 제 문학도 그런 날이 많았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고 답답한 날이 많았습니다. 이번 수상 소식은 이런 날 하나탕 내린 단비와도 같습니다. 큰 위안이자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늘 제가 생성하는 언어가 어떤 의미가 될까, 제가 짓는 언어의 방법들이 어떤 쓸모가 있을까 고심했습니다. 질서도 없이 범람하는 글자들 속에서 방황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묻고 또 물었습니다. 산을 오르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을 텐데, 저는 신발도 신지 않은 채 산에 오르는 것만 같았습니다. 오르는 산을 잘못 택한 것은 아닌지 회의한 적도 여러 번입니다. 어디를 바라봐야 하는지는 알겠지만 어떻게 올라야 할지는 모르는 자의 안타까움으로 늘 전전긍긍했습니다. 그럴 때 힘을 내서 올라보라고 부추겨주시는 시간이 바로 지금인 것 같습니다. 외롭지만 더 힘을 내서 올라보겠습니다. 아니, 이제 외롭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더 외롭고 싶습니다. 외롭지 않으면 자꾸 기댈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시의 길은 어차피 고독한 외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길에서 손 내밀고 힘을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신께서는 제게 어떤 크고 비밇나 일을 보여주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비밀한 일이 무엇인지 여전히 궁금해 하며 시를 씁니다. 그 비밀이 무엇인지 깨치는 날이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시를 계속 쓸 수밖에 없는 힘은 깨치는 그날이 언제인지 모른다는 확신 때문입니다.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이제 책상에 앉아 한 걸음씩 천천히 걸어가 보겠습니다.


-《시사사 》2017년 89호, 중에서





이재훈 : 1972년생, 1998년 『현대시』신인상으로 등단,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 박사,

  2012 한국시인협회 제8회 젊은 시인상 수상, 2017 제 3회 <한국서정시 문학상>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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