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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맞는 운동장 / 황유원

kiku929 2017. 12. 21. 18:44



비 맞는 운동장



황유원




비 맞는 운동장을 본 적이 있는가

단 한 방울의 비도 피할 수 없이

그 넓은 운동장에서 빗줄기 하나 피할 데 없이

누구도 달리지 않아 혼자 비 맞는 운동장

어쩌면 운동장은 자발적으로 비 맞고 있다

아주 비에 환장을 한 것처럼

혼자서만 비를 다 맞으려는 저 사지(四肢)의 펼쳐짐

머리끝까지 난 화를 식히기 위해서라면

운동장 전체에 내리는 비로도 부족하다는 듯이

벌서는 사람이 되어 비를 맞고

벤치에 앉은 사람이 되어 비를 맞고

아예 하늘 보고 드러누운 사람이 되어 비를 맞다가

바닥을 향해 엎드려뻗쳐 한 사람이 되어 비를 맞아 버린다

혼자 비 맞고 있는 운동장, 누가 그쪽으로

우산을 든 채 걸어가는 걸 본 적이 있다

검은 우산을 들고 있어서 멀리서 보면 무슨 작은

구멍 같아 보이는 사람이 벌써 몇 바퀴째

혼자서 운동장을 돌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도 비 맞으며 뛰놀진 않는 운동장

웅덩이 위로 빗방울만 뛰노는 운동장에서

어쩌면 운동장 구석구석에 우산을 씌워주기 위해

어쩌면 그건 그냥 운동장의 가슴에 난 구멍이

빗물에 이리저리 떠나니고 있는 건지도 몰랐지만

공중을 달려든 비들이

골인 지점을 통과한 주자들처럼 모두

함께 운동장 위로 엎질러지는 동안

고여서 잠시, 한 뭉테기로 휴식하는 동안

우산은 분명

운동하고 있었다

혼자서 공치고 노는 사람이

혼자서 차고

혼자서 받으러 가듯

비바람에 고개 숙이며 간신히 거꾸로

뒤집어지지 않는 운동이었다

상하 전후 좌우로 쏟아지는 여름의 십자포화(十字胞火)를 견디며

마치 자기가 배수구라도 되겠다는 양

그 구명 속으로 이 시의 제목까지 다 빨려 들어가 버려

종이 위엔 작은 구멍 하나만이 남아 있을 때까지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자신을 소멸시키겠다는 듯이

가까스로 만들어낸 비좁은 내부 속으로

하염없이 쏟아지는 빗소릴

집중시키고 있었다



-시집 『세상의 모든 최대화』(민음사,2016)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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