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반생 / 김중일

kiku929 2017. 12. 15. 23:37





반생



김중일
​ 
 


내가 평생을 다 살아도 절반이다.
그는 죽기 직전 생일케이크 위의 촛불처럼 훅, 나를 불어 껐다.
암전, 그 순간 나의 반생(半生)이 시작됐다.
그는 나의 반생을 살기 시작했다.

내 반생을 살러 가는
죽은 그의 이마는 전생부터 흙속에 박혀 있던 돌처럼 차가웠다.
죽은 그의 손등은 바다의 끝에 가라앉아 있던 돌처럼 차가웠다.
내 차가운 꿈은 돌처럼 내 잠 속에 박혀 있다.
흐물거리는 내 몸은 그의 유언이다.
돌멩이 같은 내 마음은 그의 유품이다.

그가 죽던 날, 꽃들이 흰 치마처럼 하늘로 활짝 펼쳐졌다.
나무에서 자던 새들이 하늘로 뚝뚝 떨어졌다.
그 봄에, 하늘로 끌어당겨지는 반중력 속의 꽃과 새와
그는 나의 반생을 대신 살기 시작했다.

길 위로, 그와 나 사이로
형광펜처럼 그어진 햇빛도 달빛도 닿지 않는 세계의 모서리
그 모든 그늘은 단단한 댐처럼, 일렁이는 햇빛을 가둔다.
그 모든 어둠은 눈 깜짝 할 새, 시간처럼 새는 달빛을 가둔다.
나는 문을 열고,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햇빛 속으로, 달빛 속으로 뛰어든다.

봄밤에 눈송이가 내 한쪽 눈썹에 내려앉는다.
한쪽 눈썹이 우르르 내려앉는다.
반생은 반드시 반쪽이 무너지는 순간 시작된다.
가장 깊숙이 무너지며, 반대편에서 생생히 일어서는 반생.

그가 죽는 순간 시간이 정확히 반으로 쪼개졌다.
두 개의 낮과 두 개의 밤,
어제의 어제와 오늘의 오늘,
그가 나의 반생을 살고 있다.
그는 내가 미리 남긴 유언이다



-《내일을 여는 작가(2017년 가을) 중에서






*

어머니가 돌아가신 그 순간 

나의 세상의 반이 함께 사라졌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말하고는 하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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