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自轉1 / 강은교

kiku929 2017. 12. 21. 10:22



自轉Ⅰ



강은교



날이 저문다

먼 곳에서 빈 뜰이 넘어진다.

無限天空(무한천공) 바람 겹겹이

사람은 혼자 펄럭이고

조금씩 파도치는 거리의 집들

끝까지 남아있는 햇빛 하나가

어딜까 어딜까 都市(도시)를 끌고 간다.


날마다 우리나라에

아름다운 女子(여자)들은 떨어져 쌓인다

잠속에서도 빨리빨리 걸으며

寢床(침상)밖으로 흩어지는

모래는 끝없고

한 겹씩 벗겨지는 生死(생사)의

저 캄캄한 數世紀(수세기)를 향하여

아무도 자기의 살을 감출 수는 없다


집이 흐느낀다.

날이 저무다.

바람에 갇혀

一平生(일평생)이 落果(낙과)처럼 흔들린다.

높은 지붕마다 남몰래

하늘의 넓은 시계소리를 걸어놓으며

曠野(광야)에 쌓이는

아, 아름다운 모래의 女子(여자)들


부서지면서 우리는

가장 긴 그림자를 뒤에 남겼다





  이 시는 매우 독특한 문장 구조를 문맥 사이에 심어놓음으로써 시적 긴장을 만들어낸다. 그 문장들은 주로 '선택 

제약'을 벗어난 문장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즉 문장을 구성하는 어휘 항목 가운데 함께 쓰일 수 없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함께 묶어 놓으면 규범문법 구조로부터 일탈하게 된다. 이 같은 문장을 찾아보자.


' 빈 뜰이 넘어진다.

' 사람은 혼자 펄럭인다.

' 햇빛이 도시를 끌고 간다.

女子(여자)들은 떨어져 쌓인다

' 집이 흐느낀다.

一平生(일평생)이 落果(낙과)처럼 흔들린다.


  이 문장들은 주어와 술어가 선택 제약을 벗어난 채 연결 되어 있다. 주어에 맞지 않는 동사가 한 문장 안에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이처럼 선택 제약을 벗어난 주어와 술어는 서로이 층위가 어긋난 경우로 대부분 주어를 다른 층위로 옮겨놓는 

은유의 형태가 된다. 따라서 '빈 뜰'의 공간은 넘어지는 속성을 가진 수직적 사물의 층위로, 사람은 펄럭이는 헝겊(직물)의

층위로, 햇빛은 이동수단(수레)의 층위로, 여자는 떨어져 쌓이는 낙엽이나 낙과의 층위로, 집은 흐느끼는 인간의 층위로,

일평생은 과실의 층위로 각각 이동한다. 이와 같은 이동성이 시 전체의 분위기를 주조해낸다. 넘어지고 펄럭이고 끌고 가고

쌓이고 흐느끼는 것들이 저무는 날의 시간성과 어우러져 뭔지 모를 불안함과 슬픔을 느끼도록 유도한다. 시인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불안하고 슬픈 분위기 속에 아름다운 모래의 여자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여자는 육체성이 해체된

'모래'로 비유되고 있다. 살과 수분을 다 증발시킨 모래의 형상은 분명 죽음의 형상이라 할 수 있다. 일말의 끈적임마저

사라진 분말로서 죽음의 형상은 깨끗하고 허무하다. 그렇기 때문에 '아름다운 모래의 女子"들이라는 표현이 가능하다.

강은교는 이 시를 통해 추하지 않은 그러나 그 무엇보다 허무한 죽음의 이미지를 생성해낸다. 그것은 "한 겹씩 벗겨지는

生死(생사)의/ 저 캄캄한 數世紀(수세기)" 동안 지속적으로 반복되어 왔던 실존의 비극을 함의한다.

 이때 "하늘의 넓은 시계소리"는 거대한 우주의 운행 즉 자전을 뜻한다. 그것은, "날이 저문다."는 시간성과 맞물린다.

날이 저무는 시간을 반복하다보면 인간은 모래가 된다. 이 가은 존재의 실존적 사태를, 그것이 불러오는

허무의 심연을 이 시는 선택 제약을 벗어난 은유적 이미지를 통해 구체화한다. 그 은유적 이미지들은 처연하고 아름답다. 

시간과 실존, 허무 등의 문제는 추상적 관념의 세계라 할 수 있다. 강은교는 이러한 추상적 세계를 쓸쓸하고 처연한 은유적

이미지를 통해 체감하게 만든다. 이처럼 시의 은유는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인 사물로 바꿈으로써 의미의 이해만이 아니라 

그것을 정서화함으로써 감각과 느낌을 동시에 전달하고자 한다. 이것이 시가 품고 있는 은유적 사유의 독특함이라 할 수 있다.


- 『은유』(시인수업 01) 중에서 / 엄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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