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종지의 소금을 대하고서는
문태준
그릇에 소금이 반짝이고 있다
추운 겨울 아침에
목전目前에
시퍼렇게
흰 빛이
내 오목한 그릇에
소복하게 쌓였으니
밤새 앓고 난 후에
말간 죽을 받은 때처럼
마음속에 새로이 생겨나는 시詩를 되뇌듯이
박토薄土에 뾰족이 돋은 마늘 촉을 보듯이
-시집『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문학동네, 2018)
연꽃
문태준
산골짜기에서 떠온 물을 너른 대접에 부어놓네
담겨진 물은 낮춰 대접에게 잘 맞추네
나는 일 놓고 연꽃만 바라보네
연꽃의 심장 소리를 들으려고
활짝 핀 꽃 깊고 깊은 곳에
어머니의 음성이 흐르네
흰 미죽糜粥을 떠먹일 때의 그 음성으로
산중山中 제일 오목한 곳에 앉은 암자庵子의 모양대로
-시집『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문학동네, 2018)
묵정밭에서
문태준
찾아가고 싶다 밭 가운데 무너지는 무덤, 마른 쑥풀 비석 세우고 이승을 내려와도 더운밥 한술 뜨지 못하는 당신을 만나고 싶다 산에서 내려온 질경이 아카시아 들쥐에게 온몸 내주는 그대의 이력을 얘기해다오 볕바른 산중턱 이속의 억수비에도 물길 걱정 없는 그곳 버려두었으니 당신의 한평 누운 자리는 허물어지는 목, 들일과 당신이 부린 집짐승과 농사 일지를 기억해주오 서러울 것 없다 바람 얌전하고 亡者여, 이 세상 저물녘에 둥근 집으로 지고 들어간 것은 무엇입니까
-시집『수런거리는 뒤란』(창비, 2000)
상여가 지나가는 마을의 하루
문태준
죽은 그 여자 부르튼 발을 일으켜 세우네
여인들은 널어둔 빨래를 걷고 문을 걸어잠가, 지금은
상여가 지나갈 때
산 그늘이 내린 찬 저수지를 물뱀 한마리 건너가는 것을 보았네,
서리 찬 물길에 닿는 꽃잎을
살아 마른 길 위에 눕던 사람, 마른 쑥부쟁이처럼 떠돌라지
상여가 나간 마을에 군불 연기가 피어오르고
흙을 파먹는 우엉뿌리 같은 군불 연기가 피어오르고
상여꾼들이 짚가리처럼 모여 마른 떡을 구우며 저무는 하루
-시집『수런거리는 뒤란』(창비, 2000)
하늘궁전
문태준
목련화가 하늘궁전을 지어놓았다
궁전에는 낮밤 음악이 냇물처럼 흘러나오고
사람들은 생사 없이 돌옷을 입고 평화롭다
목련화가 사흘째 피어있다
봄은 다시 돌아왔지만 꽃은 더 나이도 들지 않고 피어 있다
눈썹만한 높이로 궁전이 떠 있다
이 궁전에는 수문장이 없고 누구나 오가는 데 자유롭다
어릴 적 돌나물을 무쳐먹던 늦은 저녁밥때에는
앞마당 가득 한사발 하얀 고봉밥으로 환한 목련나무에게 가고 싶었다
목련화 하늘궁전에 가 이레쯤 살고 싶은 꿈이 있었다
-시집『맨발』(창비, 2004)
老母
문태준
반쯤 감긴 눈가로 콧잔등으로 골짜기가 몰려드는 이 있지만
나를 이 세상으로 처음 데려온 그는 입가 사방에 골짜기가 몰려들었다
오물오물 밥을 씹을 때 그 입가는 골짜기는 참 아름답다
그는 골짜기에 사는 산새 소리와 꽃과 나물을 다 받아먹는다
맑은 샘물과 구름 그림자와 산뽕나무와 으름덩굴을 다 받아먹는다
서울 백반집에 마주 앉아 밥을 먹을 때 그는 골짜기를 다 데려와
오물오물 밥을 씹으며 참 아름다운 입가를 골짜기를 나에게 보여준다
-시집『가재미』(문학과지성사, 2006)
시월에
문태준
오이는 아주 늙고 토란잎은 매우 시들었다
산 밑에는 노란 감국화가 한 무더기 헤죽, 헤죽 웃는다 웃음이 가시는 입가에 잔주름이 자글자글하다
꽃빛이 사그라들고 있다
들길을 걸어가며 한 팔이 뺨을 어루만지는 사이에도 다른 팔이 계속 위아래로 흔들리며 따라왔다는 걸 문득 알았다
집에 와 물에 찬밥을 둘둘 말아 오물오물거리는데
눈구멍에서 눈물이 돌고 돌다
시월은 헐린 제비집 자리 같다
아, 오늘은 시월처럼 집에 아무도 없다
-시집『가재미』(문학과지성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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