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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손가락의 詩 / 진은영

kiku929 2018. 7. 20. 15:55
 



긴 손가락의 詩 



진은영 




 시를 쓰는 건 
 내 손가락을 쓰는 일이 머리를 쓰는 일보다 중요하기 
때문. 내 손가락, 내 몸에서 가장 멀리 뻗어나와 있다. 
나무를 봐. 몸통에서 가장 멀리 있는 가지처럼, 나는 건 
드린다, 고요한 밤의 숨결, 흘러가는 물소리를, 불타는 
다른 나무의 뜨거움을, 

 모두 다른 것을 가리킨다. 방향을 틀어 제 몸에 대는 
것은 가지가 아니다. 가장 멀리 있는 가지는 가장 여리 
다. 잘 부러진다. 가지는 물을 빨아들이지도 못하고 나 
무를 지탱하지도 않는다. 빗방울 떨어진다. 그래도 나 
는 쓴다. 내게서 제일 멀리 나와 있다. 손가락 끝에서 
시간의 잎들이 피어난다. 



- 시집『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2003




*

진은영 시인 
1970년 대전 출생, 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
2000년 계간 『문학과사회』 봄호에 「커다란 창고가 있는 집」 외 3편을 발표하면서 시단에 데뷔
시집 -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2003년 문학과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