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밭처럼
나희덕
저 야트막한 포도밭처럼 살고 싶었다
산등성이 아래 몸을 구부려
낮게 낮게 엎드려서 살고 싶었다
숨은 듯 숨지는 않은 듯
세상 밖에서 익혀가고 싶은 게 있었다
입 속에 남은 단 한마디
포도씨처럼 물고
끝내 밖으로 내어놓고 싶지 않았다
둥근 몸을 굴려 어디에 처박히고 싶은 꿈
내게 있었다, 몇장의 잎새 뒤에서
그러나 나는 이미 세상의 술틀에 던져진 포도알이었는지 모른다
채익기도 전에 으깨어져 붉은 즙액이 되어 버린, 너무 많은 말들을
입속 가득 머금고 울컥거리는, 나는 어느새 둥근 몸을 잃어버렸는지
모른다 포도가 아닌 다른 몸이 절벅거리며, 냄새가 되어 또 하나의
풍문이 되어 퍼져가면서, 세상을 적시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저 멀리 야트막한 포도밭의 평화,
아직 내 몸이 가지에 매달려 있는 것만 같아
사라진 손으로 사라진 몸을 더듬어 본다
은밀하게 익혀가고 싶은 게 있었던 것처럼
나에게 사라진 손은, 사라진 몸은 무얼까.
은밀하게 익혀가고 싶었던 건 또 무얼까.
형체도 없이 사라져버린 그런 것들이
어쩌면 진짜의 나였는지도....
채 익기도 전에 상실된 나를 찾아 나는 평생토록
찾아 헤매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꺼내든 시집,
손이 먼저 가는 나희덕의 시집을 읽고 있다.
나희덕 시인은 존재하는 사물들을 자기의 내면으로 자연스레 끌어들이며
자신과 클로즈업시키고는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을 정확히 건져올린다.
그러면서 감탄하게 되는 건 그런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과 느낌임에도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는 것이다.
내가 나희덕 시인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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