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은
오인태
그땐 그랬다. 그 신안동 골목길
아마 일본식 슬라브 건물이었을 것이다.
봄이면 견고한 담장 너머로 백목련과
산수유꽃이 햇살보다 더 눈부시게 피었다.
그러나 그 오래 되어 윤기 없는
목제 대문은 늘 굳게 닫혀 있었다.
등뒤의 그녀는 무슨 말인가 끊임없이
보내왔지만 나는 내게 오는 말들을
모두 흘려보냈다. 세상 이쪽과 차단된
담 너머 저 눈부신 꽃 그늘 속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혹은 지금 누군가가
책갈피에 꽃잎을 끼우며 책을 읽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에만 골몰했었다.
아마 그 다음 해 봄이었을 것이다.
그때에도 어김없이 백목련과 산수유꽃은
전등처럼 환하게 골목을 비추고 있었고,
등뒤의 그녀는 내게 말을 보내왔다.
저 떠나요. 그래도 붙잡지 않겠죠.
나는 또 그녀의 말을 흘리며, 꽃의
눈부신 그늘에 앉아 있을 사람의
책장 넘기는 소리와 봄햇살에 바스락대는
옷자락 소리에만 모든 귀를 열어놓고
그리워했다. 그런 내 등을 등지며
그녀는 떠났다. 그 이후로도
내게 말을 보내오는 여자들은
그림자처럼 늘 내 등뒤만 따라다니다가
또 그렇게 떠나갔다.
지금도 그렇다. 그 신안동 골목길은
떠나왔지만, 등뒤에서 말을 보내오는
여자는 많았지만, 내가 정작
가슴 앓으며 그리워하는 이는
얼굴 한 번 본 적도 없는 신안동
그 골목길 백목련과 산수유꽃이 환하던
담장 안의 그런 사람이다.
등뒤의 여자들에게 참 미안한 일이지만
내 사랑은 스스로도 영문 모를
늘 그런 사랑이다.
*시집 <등 뒤의 사랑>
여자에게 사랑이 꿈이라면
남자에게 사랑은 갈망이라고 한다.
갈망의 어원은 '사라진 별을 그리워하다'라는 의미인데
남자들이 이루지 못한 첫사랑을 평생 그리워하는 일도
어쩌면 그 첫사랑이 '사라진 별'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담장안에 '사라진 별'이 있을 거라고 믿는 남자들은 참으로 바보이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믿는 남자는 평생 사랑을 구하기 위해 떠돌뿐
사랑 한 조각도 가슴에 담아둘 수 없으리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과
사랑의 감정을 사랑하는 일은 엄연히 다르거늘...
자기 도취나 자기 충만감의 사랑을 구하는 한
우린 서로의 주변을 떠도는 외로운 행성들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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