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주전자
정다혜
새로 산 유리 주전자 새까맣게 타 버렸다
버리려다 잊어버린 낡은 주전자 기억하고
불 위에 올렸다, 찌그러진 몸통, 구부러진 입
흔적만 남은 꽃무늬 몸통 속에서 물이 끓는다
잊어버렸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안인가
잊어버리는 것보다 기억 하는 일이 더 힘든 일
첫 편지, 첫 키스, 첫 사랑, 첫 눈물, 첫 이별처럼
내가 기억하는 것은 상처로 남았는데
우연히 책갈피 속에서 찾은 꽃잎 한 장,
잊어버린 옛 친구의 사진,
서랍 속에서 툭 떨어지는 보내지 못한 편지
잊어버린 것들은 잊어버린 시간과 함께 온다
오래된 주전자가 쉬쉬쉬 소리 내며 끓는다
내가 떠나보낸 시간도, 나를 버린 시간도
모두 잊어버린 오래된 주전자다
눈 나리는 밤 돌아서 올 때 펑펑 울던 그 사람처럼
오래된 주전자 펄펄 끓고 있다.
*2005년 <열린시학> 당선작 중에서
가끔씩은 오래된 주전자에도 펄펄 끓는 밤이 온다.
그런 날은 주전자가 만들어준 뜨거운 물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잠시 오래된 시간으로 걸어들어간다.
펄펄 물이 끓듯 누군가 나를 위해 울어준 옛날이 있다면
오늘밤은 그를 위해 내가 울어도 좋을 일.
그리고나서 다시 오래된 주전자를 잊힌듯 어느 한 구석에 가만히
놓아두고 잊었다 생각하면 된다.
아주 팽개치지는 말고 그냥 오래된 주전자로...
살다보면 오래된 주전자만이 위로가 되어주는 날도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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