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아버지의 감나무 이야기 / 안상학

kiku929 2011. 1. 29. 22:31

 

 

 

 

 

 

 

 

아버지의 감나무 이야기


 

안상학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 말 말짱 거짓말이다. 늙으면 자식 놈들 가지에 감 꼬락서닌 줄 몰라서 하는 소리지. 괜히 매달려 등골 휠 일 없다. 병든 부모는 하나도 많다던 아버지의 유언.


  차에 받혀 스무 살 기억으로 더듬더듬 다섯 해, 못난 자식들 눈에 밟히셨는지 곡기 끊고 닷새 더 살다 가셨다. 꾸역꾸역 감꽃이 천지도 모르고 피던 무렵이었다. 시원섭섭하게도, 가지 많은 나무 남은 빈 가지들은 두고두고 회초리가 되어 제 몸 제 스스로 치고 있는 중에도,


  암을 다 내려놓지 못하고 퇴원하는 누이동생은 링거 병 치켜들고 앞서 가는 열일곱 딸에게서 한 방울씩 수액을 받으며 매달려 가고 있다. 벌써부터 제 몸으로 낳은 어린 가지에 천천히 독 오른 감이 된 것일까. 아닐 것이다. 부축하는 내 손엔 이렇듯 가벼운 감 한 쪽의 누이. 그래, 그럴 리가 없다, 믿지 말아라,  아버지의 감나무 이야기 말짱 다 거짓말이다.


  누이야, 저 감나무 좀 봐. 아이야, 휘늘어져도 부러지지 않고 주렁주렁 한여름을 건넌, 잎 다 지우고도 붉게 붉게 자랑하는 저 서리 맞은 감나무 좀 보아. 어느 밤길도 환하게 비춰갈 저 무수한 등불 좀 보아.

 

 누이야 누이야
 겨울하늘 끝까지 까치밥 되도록 살아봐
 아이야 아이야
 콕콕 쪼아 먹는 까치가 되도록 살아봐

 

 *시집 <아배 생각>

 

 

 

 

 

어머님이 입원해 계신 병원의 로비 한 쪽에 꽂혀있던 시집 몇 권을 빌려와 읽고 있다.

시집은 얇지만 시들을 읽는데는 시간이 한참 걸린다.

서너번은 더 읽어야 시가 비로소 입에 감치듯 다가오기 때문이다.

시는 노래이므로.

 

오늘은 이 시를 몇번이고 읽어보았다.

읽을수록 가슴이 짠해져 하마터면 눈물이 나올 뻔 했다.

 

까치밥이어도 좋으니 자식들에게 배부르게 해줄 수 있다면 참으로 흐믓한 일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까치밥이 없어도 얼마든 거뜬하게 살아줄 거라는 걸 안다.

시인의 아버지의 말처럼 나역시 감이 되어 쓸데없이 나무 가지들만 휘청거리게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지금부터 걱정이 앞선다.

 

부모의 입장과 자식의 입장을 동시에 이해한다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아프신 어머님을 보러 다니는 일도 이젠 덤덤한 일과처럼 되었다.

갈수록 자꾸만 멀어지는 내 마음을 들여다 보며 한편으로는 나도 아이들로부터 멀어지는 내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미리 살아버린 기분이 든다.

아직 정상까지는 갈 길이 남았는데 나는 이미 다 올라서버린 것 같은 기분...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랍장은 좋겠다 / 윤희상  (0) 2011.02.27
사랑에 부쳐 / 김나영  (0) 2011.01.31
죽은 새를 위한 첼로 조곡 / 함기석  (0) 2011.01.28
오래된 주전자 / 정다혜  (0) 2011.01.28
슬픔이 없는 십오 초 / 심보선  (0) 2011.0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