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꽃 피지 않는 봄이 올 것이다시인의 부음이 그전에 당도할 것이다
김선우
아직 때가 아니라고
이주하는 구름들의 해진 눈꺼풀 위에 문 닫은 나무들의 냉담 위에
비린 바람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붉은 바람이
여러번 태어나도 매번 처음인
매번 연습이 모자라는 생
아직 태어나지 않아 다행이라며 깃발을 흔드는 죽은 시인이여 장미 열매를 쪼개고 뜨거운 붉은 차돌을
꺼내 손에 쥔 아직 살아 있는 시인이여
가로수 밑 식탁에 작년 꽃의 두개골을 올려놓지 말 것
기억을 두려워해 기억을 배신하는 눈보라
아직 때가 아니라고
웅얼거리는 하얗게 혼이 빠진 천둥소리 밑에서 불면을 향유하는 잠입자여
돈 때문에 질병 때문에 절망 때문에 질투 때문에 분노 때문에 전쟁 때문에 이기심 때문에 경쟁 때문에 증오 때문에
냉소 때문에 무지 때문에 무수한 이유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가지만
시취를 맡았다는 개들 아직 없고
미래가 중단되었다는 진단서 아직 없고
지금은 죽을 때가 아니라는 방부된 속삭임,
아직 살아 있는 시인은 죽을 때를 기다렸다
희망은 아프다 아픈 곳에서 태어나는 게 희망이므로
나는 치유되지 않을 것이다 불치의 것들과 함께 끝까지 갈 것이므로
저 숱한 죽음의 이유는 비루하다 최선은
사랑 때문에 죽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
이런 말을 지껄이는 시인의 매장을 바라는 은밀한 마음들을 애도하며 시인은 썼다
사랑 때문에 죽는 사람이 없다는 것 - 그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불명예다
내 시는 명예의 쪽인가 불명예의 쪽인가
검은 밑줄이 시인이 남긴 마지막 기록이었다
밑줄의 오른쪽 끝에 힘이 들어가 씨앗처럼 잠시 반짝였으나
꽃은 피지 않았다
아무도 사랑 때문에 죽지 않게 된 지 오래되었으므로
아직
사랑해서 죽은 자,
마지막 시인이었다
*시집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가끔 시인들의 시를 읽고 있노라면 울컥할 때가 있다.
시는 죽었다고들 말하는 오늘날,
그럼에도 그들은 왜 시를 써야만 하는가.
그건 쓰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기에,
그래서 운명이 되는 거라고,
시는 그렇게 태어나는 게 아닐까.
세상을 향한,
자기 구원의 애닲은 손짓으로...
*
*
*
사랑 때문에 죽는 자,
이제는 없다.
시도 그들과 함께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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