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 사회 /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문학과 지성사 (2014)

kiku929 2014. 8. 7. 23:43

 

 

 

 

내가 읽은 책에서 가장 추천하고 싶은 책을 말하라고 한다면 난 주저없이 이 <투명사회>를 뽑을 것이다.

카프카가 말한 대로 이 책을 읽는 동안 순간순간이 '도끼가 머리를 찍는'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현대를 상징할 수 있는 인터넷, 디지털,스마트폰, 성과급, 포르노적 전시, 개인의 상품화... 등과 더불어 그에 따른 인간  삶의

변화된 현상이 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를 예리하게 파헤치고 있다.

그러면서 지금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기라고 이야기 한다.

 

이 책이 나오기 전, 국내에 소개된 <피로사회> 역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예리한 통찰을 통해 정곡을 찌르는 명쾌한 철학적 해석으로 현대의 병리 현상을 파헤친 것인다.

그것은 부정성의 소멸과 더불어 긍정성의 과잉에서 오는 '신경증'이 만연한 피로 사회라는...

<투명사회>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좀더 세밀하게 부분부분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책의 내용을 기술하자면 너무 많은 분량을 요하기에 책의 마지막에 실린  역자의 말을 옮기는 것으로 대신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역시 막내에게 부탁하였다.

옮기면서 한 문장이라도 기억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5000원을 지급하는 조건으로 --)

 

 

 

 

불투명성의 옹호

 

 

한병철을 한마디로 규정한다면 부정성의 철학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피로사회』(2010: 한국어판 2012)에서 한병철은 근대 이후, 즉 흔히 포스트모더니즘으로 규정되는 20세기 후반부터 사회 전체를 관통하는 근본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부정성의 소멸과 긍정성의 과잉으로 요약된다. 과잉된 긍정성으로 터져버릴 것 같은 사회, '나는 할 수 있다'는 정신이 최고의 가치가 된 사회를 한병철은 성과사회라고 명명한다.

피로사회는 성과사회의 이면, 또는 성과사회의 다른 이름이다. 성과사회에서 개인은 자신을 위해 최대의 성과를 올리려 하며, 이를 위해 자신을 채찍질한다. 스스로에 의한 학대에서 피로가 생겨난다.

착취자와 피착취자의 계급적 분리가 불가능해진 사회, 착취자가 곧 피착취자인 자기 착취의 사회, 모두가 스스로의 경영자인, 또는 경영자여야 하는 사회, 그것이곧 한병철이 말하는 성과/피로사회다.

 

여기서 우리는 한병철이 말하는 부정성의 소멸에 관한 테제를 다시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한병철이 피로사회라는 명명으로 진단한 현 시대의 깊은 병은 궁극적으로 부정성의 소멸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체 부정성이란 무엇인가?

부정성 개념은 한병철의 저술 속에서 다양한 의미를 지니지만 그 가장 핵심적인 의미를 꼽는다면 '타자', 즉 '나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의 의와 통제에 따르지 않는 것, 나에게 거역하는 것, 나를 꼼짝 못하게 하는 것, 내가 원하지 않는 것,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 혐오스러운 것, 심지어 나를 공격하고 파괴하려고 위협하려는 적, 이 모든 것이 부정성의 범주에서 속한다. 어떤 의미에서 인류의 역사는 부정성과의 지난한 투쟁의 역사였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온갖 적대적인 자연의 영향에 그대로 노출된 채, 특별히 자랑할 만한 것이 못되는 육체적 힘에 의존하여 연명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던 초기 인류에서부터 이미 부정성과의 투쟁은 시작된 것이다. 인간 문명은 부정성을 극복하고 스스로의 계획과 의지에 따라 세계를 제어할 수 있는

향으로 전진해왔다.

문명의 진보는 곧 부정성의 축소인 것이다. 특히 서양의 근대에 이르러 부정성의 축소 과정은 인류 전체의 역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자각적이고 체계적으로 진행된다.

이 과정은 상이하지만 긴밀하게 연결된 두 차원에서 동시에 전개되었다. 하나는 자연과의 관계에서 일어난 비역적인 부정성의 축소로서, 과학기술의 발전과 산업화가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다른 하나는 사회적 관계에서 일어난-역시 비약적인-부정성의 축소로서, 이는 정치적 민주화와 함께 개체로서의 인간이 권력, 종교, 이데올로기 등에 의한 사회적,집단적 구속에서 점차 해방되어가는 과정으로 기술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 차원과 자연적 차원에서 모두 부정성의 축소 과정이 충분히 진행되어 개개인이 그것이 낳은 자유의 과실을 만끽하게 된 사회가 바로 후근대적(포스트모더니즘적) 사회인 셈이다.

사회가 이 단계에 이르면 어떻게 남아 있는 부정성을 더 축소시킬 것인가보다 부정성의 퇴각이 남긴 빈 공간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가 사람들의 더 큰 관심사가 된다. 인간은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을 자기 뜻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겨난 커다란 자유가 사람들에게 각자의 삶에서 어떤 뜻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이냐에 대한 대답까지 자동적으로 주는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병철은 우리의 당면 위기가 궁극적으로 부정성이 지나치게 축소되었다는 사실 자체에서 온 것이라고 지적한다.

한병철은 근대가 철저하게 퇴치하려고 싸워 온 부정성이 사실은 인간의 삶을 떠받쳐온 버팀목이었다고본다. 싸워야 할 적으로서의 부정성도, 또는 반드시 순종하지 않을 수 없는 사회적, 자연적 전제로서의 부정성도, 모두 인간의 삶에 일정한 위치와 방향과 의미를 정해준느 중요한 기능을 해왔다는 것이다.

부정성은 우리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려주는 이정표였다. 반면 오늘날 막대한 자유 공간을 확보한 인간의 의지는 정박

할 닻을 내리지 못하고 방향을 상실한 채 이리저리 떠돌고 있다. 그것이 이 시대가 당면한 위기의 본질이다.

 

투명사회에 대한 한병철의 비판은 이러한 부정성의 사상을 시각적-인식적 차원으로까지 밀고 나간다. 시각적-인식적 부정성이란 보고 싶지만 볼 수 없는 것, 알고 싶지만 알 수 없는 것, 보여주고 싶지만 보여줄 수 없는 것, 알리고 싶지만 알릴 수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은 손쉽게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의 대상으로 전환해주는 디지털 기술은 시각적-인식적 부정성의 축소 내지 제거에 기여한다. 디지털 기술 덕택에 볼 수 있고 보여줄 수 있는 것의 범위가 엄청나게 확대된다. 기술적인 면에서 부정성이 급격히 축소되면서 보고 싶은 욕망, 보여주고 싶은 욕망을 가로막고 있던 사회적 차원의 부정성, 즉 도덕적 장벽도 허물어진다. 이에 따라 사람들은 과거에는 가히 보려 하지 않았던 것을 함부로 들여다보고, 수치심에서 감히 남에게 보이려 하지 않았던 것을 마구 드러낸다.

 

디지털 기술이 열어준 가능성을 사람들은 열심히 현실로 만들어간다. 시각적-인식적 부정성의 영역, 즉 비밀의 영역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리하여 가려진 것이라고는 없는 포르노적 사회, 보이는 것에만 가치가 부여되는 전시사회가 성립한다. 그것이 한병철이 비판하는 투명

사회다.

 일부에서는 이러한 사회적 발전 과정을 정보의 자유 또는 투명성과 같은 긍정적 가치의 증진으로 규정하고 대대적으로 환영하고 있다. 하지만 한병철에게 투명사회는 무엇보다도 시각적-인식적 부정성의 상실, 꿰뚫어볼 수 없는 타자의 상실, 삶의 의미와 진리를 지탱해주는 비밀의 상실

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이는 모든 무지와 몽매를 몰아냄으로써 인간의 해방을 가져오려고 했던 계몽주의의 기획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생각이 아닌가? 투명성의 추구야말로 근대적인 계몽의 기획을 충시히 이어가는 태도가 아닌가? 저자는 포스트모던 몽매주의를 부추기려 하는 것인가? 아마도 이에 대해 한병철은 이렇게 답할 것이다.

 

계몽주의는 너무나 많은 부정성, 너무나 많은 어둠 속에서 발생한 정신적 운동이었다. 계몽주의가 던진 이성의 빛은 바로 그러한 부정성과의 격렬한 대립을 통해서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과도한 조명 속에 시달리고 있는 오늘날의 투명사회에서 계몽주의의 빛은 쓸모없는 잉여물 혹은 시대착오일 뿐이다.

또한 근대의 계몽주의적 의미에서 진리 탐구는 오늘날 더 많은 정보와 투명성에 대한 요구와는 완전히 성격을 달리한다. 근대는 진리를 향한 열정에서 위대한 과학과 이론을 낳았다. 과학과 이론은 정보가 아니다. 과학과 이론은 언제나 볼 수 없는 것, 직접적으로는 결코 알 수 없는 것에서 나왔고, 그러한 불투명한 세계(부정성, 타자)에 대한 위대한 상상을 양분으로 하여 자라났다. 사람들이 지구가 도는 것을 두 눈으로 볼 수 있었다면 지동설은 아무런 이론적 가치도 지니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정보 과잉의 시대에 빅데이터가 이론을 대체할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는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인간의 삶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온 모든 종교와 윤리, 이념 역시 삶의 불투명성, 미래의 불투명성이 아니었다면 아예 존재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정보가 전부인 시대에 사람들은 정보를 가지고 있거나 가지고 있지 않거나 둘 중의 한 가지 가능성만을 알 뿐이다. 삶의 의미가 어떤 믿음에서 나온다고 한다면, 그 믿음은 한병철이 지적하듯이 다시 불투명성을 전제한다. 빅데이터는 이론과 함께 믿음도, 의미도 파괴한다.

 

『투명사회』 한국어판은 투명성에 대한 독일 사회의 주류 담론에 정면으로 거스르는 비판적 입장을 제시하여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투명사회Transparenzgesellscbaft』(2012)와 디지털 문명에 대한 진단을 제시한 『무리 속에서-디지털의풍경들Im Scbwarm. Ansicbten des Digitalen』(2013)을 번역하여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이다.

이 두 편의 에세이에서 저자는 21세기의 사회적 진화 과정 전반에 소멸과 나르시시즘의 강화 경향을 한병철 특유의 간결한 문체와 비정통적 시각으로 집요하게 날카롭게 파헤치고 있다. 한병철은 모든 것이 겉이 되어가는 사회, 진리는 없고 정보만이 있는 사회, 낯선 타자와 직접 맞닥뜨릴 기회가 점점 줄어들고 사람들이 오직 자신에게 익숙하게 길들여진 것만 상대하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된 나르시시즘적 사회의 모습을 섬뜩할 정도로 날카롭게 느끼게 해준다.

 

왜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병원에 가서 얼굴을 바꿀 수 있게 되었는지, '다본다'라는 위협적인 구호가 왜 인기 상품의 이름이 될 수 있는지, 개인 정보 유출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디지털 문명과 SNS등이 왜 새로운 형태의 직접 민주주의를 낳지 못하는지, 왜 무한한 소통의 자유가 연대로 이어지지 못하는지,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무한한 정보의 바다를 헤엄칠 수 있게 된 사람들이 왜 세계에 대해서 아는 것은 그다지 늘지 않았는지, 스마트폰의 카메라와 터치스크린이 실제로 어떤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지, 이런 문제에 대해 비판적으로 숙고해

보고싶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투명사회』는 독자들에게 그렇게 투명하게 느껴지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독자가 이 불투명한 책을 천천히 읽고 음미하면서 흔히 부정적으로만 생각되는 부정성의 진정한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면 오늘을 지배하는 과도한 긍정성의 조류에 휩쓸리지 않고 그 결을 거슬러서 살아갈 수 있는 어떤 힘을 이 책에서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2014년 2월

                                                                  

 김태환

 

 

 

 

 

<저자 소개>

 

고려대학교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한 뒤 독일로 건너가 철학, 독일 문학, 가톨릭 신학을 공부했다. 1994년 하이데거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2000년에는 스위스 바젤 대학에서 데리다에 관한 논문으로 교수 자격을 취득했다. 독일과 스위스의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으며, 현재 독일 카를스루에 조형예술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피로사회'(2010)를 통해 독일에서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며 가장 주목받는 문화비평가로 떠올랐으며, 한국에서는 2011년 '권력이란 무엇인가'를 통해 처음 소개되었다. '하이데거 입문', '죽음의 종류: 죽음에 대한 철학적 연구', '죽음과 타자성', '폭력의 위상학'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