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자전거
아버지 돌아가시고 마당 한 구석 오래도록 서 있던 자전거를 만지며 나는 홀로된 시간만큼 자전거도 말없이 녹슬어 갔다는 것을 알았다. 저항의 흔적이란 조금도 없는 순순한 자세, 그것은 그리움의 더께였다.
아버지가 아내에게 유일했던 사랑이라면 사시사철
이른 아침 숲으로부터 들꽃을 배달해준 것이었다
자전거에 실어 나르던 그 들꽃들의 향내는
햇살에 반짝이는 은빛 바퀴살에 통통 튕기다 날아가고
문주란의 '공항의 이별'이 흘러나오던 전축위로는
호명을 받은 꽃들이 차례로 화병 속에 머물다 가버리고는 했다
어린 딸에게 나날은 꽃 속에 묻혀 향기로웠고, 아내의 한 해는
얼음장 밑 시냇물 소식을 알려주는 버들강아지로 시작하여
청미래 덩굴의 탱탱하고 탐스런 빨간 열매로 끝나던 시절,
그렇게 해마다 시간은 음표처럼 흘러가고 앞날도 의심치 않았지만
잠자는 숲속의 마법처럼 아버지의 죽음은 한순간 모든 것을 잠재우고는
한번쯤이라도 같은 세월은 다시 오지 않았다
자전거가 빛을 잃어갈수록 아내의 외로움도
꽃병 속에서 하얀 눈처럼 쌓여만 가고
말라버린 붉은 열매가 바스락 힘없이 떨어져 버린 날,
그녀의 일생도 마저 져버린 것이었을까
자전거가 주인 없이도 한동안 버티었던 것처럼 그녀도 그렇게
버티었을 뿐이라는 것을,
들꽃 가득한 우리들만의 성지는 아직 잠 속에 있는 지금
이제 남은 것은
자전거와 그 때를 기억하는 나일뿐
-위풍당당하게 주인을 태우며 어디든 달려가던 자전거의 찬란했던 한 시절, 꽃을 주는 남자와 꽃을 받는 여자, 그리고 그 안에서 무럭무럭 자라던 딸의 모습을 나는 한 장의 사진처럼 간직하고 비로소 고물이 되어버린 자전거를 치울 수 있었다. 문득 가을이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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