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의 세계
이 혜미
잠든 이의 코에 손을 대어보는 사람은
영혼을 믿는 자다 깊은 밤,
숨은 수풀을 지나 진창을 흐르고
깊이 젖어 고단한 채 돌아온다
녹기 시작한 발자국을 따라가듯
먼저 잠든 이의 숨에 입김을 잇대어
호흡의 다발을 엮으면
한 편은 불타는 숲
한 편은 휘도는 눈보라
사이를
숨은 새처럼 날아간다
문득, 다른 궤도로 진입하는 행성처럼
안겨 잠든 새벽에만 들리는 소리가 있어
하나의 눈송이가 메마른 들판으로
순하게 내려앉는 소리
젖은 귀를 어루만지는
외바퀴 소리
가볍고 약하고 흰
매 순간 새로 태어나는 심연을 바라보며
그 속에서 얼굴을 잊는다
뒤섞여 드리우는, 스미는
점차 짙어지며 나지막해지는
*시집 『보라의 바깥』/ 이혜미, 창비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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