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없는 십오 초
심보선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질 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먹고 있다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듯도 하다
나는 길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
남자가 울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다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 동산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시집『슬픔이 없는 십오 초』/ 심보선, 문학과 지성사 (2008)
*
저녁 텔레비젼을 켜는데 <비밀독서단>이라는 프로가 진행되고 있었다.
게스트들이 각자 책을 소개하면서 책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내용이었는데
오늘 소개된 책 중 하나가 바로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였다.
시집이 잘 팔리지 않는 요즘에 이제 이 시집은 잘 팔리는 시집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 프로그램에서 소개되는 책들은 거의 베스트셀러가 된다고 하니까.
**
문학평론가 권혁웅은 지금 시대의 서정을 두 가지로 분류했다고한다
‘행복한 서정’과 ‘불행한 서정’.
이 시는'불행한 서정' 쯤에 속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자꾸 '불행한 서정'에 마음이 기우는 것일까.
그렇다고 내가 세상을 보는 시선이 비관적이거나 부정적이어서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에 대한 연민이 많아서가 아닐까.
연민을 일으키는 근원에 대한 슬픔의 감정같은 것...
그것은 역설적으로 세상에 대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왜 '십오 초'일까.
십오 초라는 시간은 찰나같이 아주 짧은 시간은 아니면서도
주위의 풍경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길 수 있는 시간으로 적당하지 않을까.
슬픔이 없다는 것은 철저하게 객관적으로만 타자를 바라볼 수 있을 때인지도 모르겠다.
창 너머 바라보듯이, 꿈을 꾸듯이, 과거와 미래를 봉하고,
하면, 소멸의 슬픔도 잠시 잊을 수 있을런지도.
그러나 그 시선을 거두고 자신에게로 오는 순간부터
슬픔의 대상은 내가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디를 가든지 사라질 수밖에 없는 길 위에 서 있는 나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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