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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퓌스 사건 (L'affaire Dreyfus) 과 에밀졸라의 "나는 고발한다"

kiku929 2015. 11. 23. 23:02

 

 

 

 

1894년 12월 22일 프랑스 육군 군법 회의가 알프레드 드레퓌스(L'affaire Dreyfus) 대위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죄목은 반역죄. 독일로 넘겨질 비밀 서류의 필적과 그의 필적이 비슷하다는 혐의는 유대계 포병 대위를 간첩으로 둔갑시켰다. 재판의 내용도 '국가 안보'라는 이름으로 감추어졌다.

범인은 따로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실수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군부는 진범 에스테라지 소령에게 무죄 선고를 내렸다. 여론은 둘로 갈라졌다. '군의 명예와 국가 질서'를 내세운 반드레퓌스파와 진실·정의·인권 옹호를 부르짖는 드레퓌스 지지파 간 팽팽한 논쟁 속에 소설가 에밀 졸라가 등장한다. '나는 고발한다'라는 제목의 그의 신문 기고문은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양분되었던 여론도 '무죄'로 돌아섰다. 결국 1906년 최고 재판소에서 무죄를 확정 선고받은 드레퓌스는 소령으로 군에 복귀했다.

사건의 파장은 넓게 퍼졌다. 공작을 통해 진실을 은폐 왜곡하고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려는 정권에 맞선 지식인들의 저항과 승리는 현대 유럽 시민 사회의 정신적 근간으로 자리 잡았다. 심심하면 고개를 들던 왕정 복고론이 자취를 감추고 군부와 가톨릭 등 기득권 세력도 힘을 잃었다. 자유와 평등, 박애로 시작한 프랑스대혁명이 이 사건을 통해 비로소 완성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드레퓌스 사건의 최대 수혜자는 이스라엘. 재판 취재 과정에서 반유대주의를 통감한 오스트리아 신문의 유대인 기자 테어도어 헤르츨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자는 시오니즘 운동을 주창, 1948년 이스라엘 국가 수립의 계기를 마련했다.

드레퓌스 재판 종결 104주년이 지난 오늘날, 근거 없는 질시와 억압은 사라졌을까. '열린 사회'라는 프랑스조차 심심치 않게 인종 분규에 시달리고 중동에서도 분노와 원한이 쌓여만 간다. 드레퓌스 사건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지도 모른다.

 

- 다음 백과 사전-

 

 

 

 

 

 

 

나는 고발한다

 

요약 1898년 1월 13일에 에밀 졸라가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 군부를 비판한 〈여명 L’Aurore〉이라는 신문에 ‘나는 고발한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공개장 형식의 글.

원 제목은 ‘공화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여명〉의 편집장 클레망소가 ‘나는 고발한다’라는 제목으로 바꾸는 것을 권유했다. 이 글에서 졸라는 프랑스 정부의 반유대주의와 드레퓌스의 구속과 재판에 대해 부당함을 지적했다.

졸라의 글을 계기로 드레퓌스 사건은 국민의 주목을 크게 끌기 시작했고 프랑스를 두 편으로 갈라놓았다. 이 문제는 드레퓌스가 유죄냐 무죄냐를 따지는 개인적인 문제 이상으로 받아들여졌다. 재심을 반대하는 반(反)드레퓌스파, 민족주의자, 독재주의자들은 이 논쟁을 군부의 명예를 떨어뜨리려는 프랑스의 적들이 꾸민 음모라 여겼다.

드레퓌스 사건을 재심하라는 탄원서에 약 3,000명이 서명했고 여기에는 아나톨 프랑스, 마르셀 프루스트 등 많은 지식인들이 참여했다. 졸라에 대한 재판은 1898년 2월 7일 시작되었고, 명예훼손죄로 1년간의 징역형과 벌금 3,000프랑이 선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