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오래된 이별
김경주
불 피운 흔적이 남아 있는 숲이 좋다
햇볕에 그을린 거미들 냄새가
부스러기 많은 풀이 좋다 화석은 인정이 많아
텅 빈 시간에만 나타난다 그 속에 누군가 잠시 피운
불은 수척하다
네가 두고 간 운동화 속에 심은 벤자민이 좋다
눈을 뜨면 나는 커다란 항아리로 들어가 구르다가
언제나 언덕 앞에서 멈춘다
고요로 가득한, 그러나 텅 빈 내 어미(語尾)들이 좋다
벽지 속에 사는 기린의 목처럼
철봉에 희미하게 남은 손가락 자국이, 악력이 스르르
빠져나가던 침묵이 좋다 내가 어두운 운동장이라서
너는 엄지를 가만히 내 입속에 넣어주었다
-김경주 시집『고래와 수증기』中 / 문학과 지성사,2014
김경주 시인의 시 중에서 좋아하는,
특히 마지막 연...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싱고 / 신미나 (0) | 2016.04.12 |
---|---|
내 척박한 가슴에 온 봄 / 김영승 (0) | 2016.04.07 |
어두워지는 순간 / 문태준 (0) | 2016.04.05 |
새 그리고 햇빛 / 정희성 (0) | 2016.03.31 |
가을밤 / 조용미 (0) | 2016.03.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