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아무 일 없이 / 조정인

kiku929 2017. 1. 17. 09:56

 


  아무 일 없이



  조정인



  이 풍성한 외로움의 배후는 당신이라는 저편이다 나무가 분홍 운무의 시간을 벗어 공중에 걸어두었다 고요한 내재율이 못물처럼 흔들린다


  텅 빈 공중에 유목의 세필(細筆)이 스친다 바람이 꽃나무를 건너는 동안 높고 낮게 드러나는 파고를 올려다본다 발밑 한 길 넘는 수심을 가장

높은 음역으로 밀어올린 꽃나무 아래 나는

 

  꽃과 꽃 사이, 꽃잎과 꽃잎 사이는 성글다가 엷다가 불현듯 깊어져 엎질러진 듯, 엎지르는 일은 없이 홀로 쟁쟁하다 바람 스산해지고 이동하는

벌판처럼 구름장이 밀려온다 낮아진 조도 아래 꽃나무 깜박 어둡다


  옅은 얼음이 자박자박 끼는 듯 차갑게 깊어진 분홍 마음 없이도 저무는 나무, 누가 내게 전지가위를 들려다오 꽃나무 깜깜하다 구름이 나무를

건너는 동안 꽃들의 살얼음이 스러지는 동안


  한 그루 꽃나무 햇빛 속으로 걸어간다, 아무 일 없다

 


 

[장미의 내용], 창비,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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