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목판화 / 진창윤

kiku929 2017. 1. 3. 05:16



목판화



진창윤




목판 위에 칼을 대면
마을에 눈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목 안쪽으로 흘러들어 고이는 풍경들은 늘 배경이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여자의
문 따는 소리를 들으려면 손목에 힘을 빼야한다
칼은 골목을 따라 가로등을 세우고 지붕 위에 기와를 덮고
용마루 위의 길고양이 걸음을 붙들고
담장에 막혀 크는 감나무의 가지를 펼쳐준다
나는 여자의 발소리와 아이의
소리 없는 울음에 나무를 새겨 넣기 위해
밤이 골목 끝에서 떼쓰며 우는 것도 잊어야 한다
불 꺼진 문틈으로 냄비 타는 냄새가 새어나오더라도
칼을 놓지 않아야 한다, 그쯤 되면
밤 열두시의 종소리도 새겨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삶의 여백은 언제나 좁아서
칼이 지나간 움푹 팬 자리는 서럽고 아프다
지붕 위로 어두운 윤곽이 드러나면 드문드문 송곳을 찍어
마치 박다 만 못 자국처럼 별을 새겨 넣는다
드디어 깜깜한 하늘에 귀가 없는 별이 뜬다
여자는 퉁퉁 불은 이불을 아이의 턱밑까지 덮어주었다
내 칼이 닿지 않는 곳마다 눈이 내리고 있다



-2017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신춘문예가 어제 발표되었다.

대략 몇 작품만 흩어보다. 그중 <목판화>라는 이 시가 내 마음에 들어와 옮겨본다.

아래는 심사평이다.




‘목판화’는 ‘시로 쓴 목판화’의 구체적 풍경을 통해 시적 형성력을 완성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우선 호감이 갔다.
목판을 깎는 조각도의 칼끝을 따라 눈 내리는 겨울밤 골목을 배경으로 삶의 고단한 한순간이 진솔하고 과장됨 없이 그려져 있다.


“불 꺼진 문틈으로 냄비 타는 냄새가 새어나오더라도/ 칼을 놓지 않아야 한다, 그쯤 되면/ 밤 열두 시의 종소리도 새겨 넣을 수 있을 것이다”라든가, “지붕 위로 어두운 윤곽이 드러나면 드문드문 송곳을 찍어/ 마치 박다 만 못 자국처럼 별을 새겨 넣는다”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삶과 시가 유리되지 않고 일체화되어 있는 점에서 당선작으로 선정하게 되었다.  

자폐적 언어의 유희화가 왜곡된 대세를 이루고 있는 오늘의 한국 시단에서 이러한 구체적 형성력의 높이를 지닌 시를 만난 것은 큰 기쁨이다.


-심사위원 황동규·정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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