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기념일 / 이장욱

kiku929 2017. 1. 20. 05:13




기념일




이장욱



 

식도에서 소장까지

기념하고 싶은 것들이 많아서

우리는 꼭꼭 씹어먹는다.

위를 기념하고

쓸개를 기념하고

무엇이든 녹이는 침을 기념하고

 

오늘은 누군가의 기일이며

전쟁이 있었던 날.

창밖의 구름은 지난해의 농담을 닮았고

농담은 피가 부족하다.

 

어제까지 어머니였던 이가

오늘은 생물이라고 할 수 없고

아이는 하루종일 거짓말에만 흥미를 느끼고

식물들의 인내심은 놀라워.

 

이빨을 드러낼 수 있는 것들에게는 반드시

식도가 있고

외로움이 있을 것이다.

지구의 공전이 계속되자

지난해의 농담들이 사라졌다.

 

흰 떡 위에 수많은 이빨이 돋아나고

우리는 무엇이든 꼭꼭 씹어먹고

모두들 별의 속도를

천천히 이해했다.

 

 

[생년월일], 창비,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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