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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증정부인 박씨묘지명 - 연암 박지원

kiku929 2017. 6. 26. 10:22



유인의 이름은 아무이니, 반남의 박씨이다. 그 동생 지원중미는 묘지명을 쓴다. 유인은 열여섯에 덕수 이택모 백규에게 시집 가서 딸 하나 아들 둘이 있었는데, 신묘년 9월 1일에 세상을 뜨니 얻은 해가 마흔셋이었다. 지아비의 선산이 아곡인지라, 장차 서향의 언덕에 장사지내려 한다.

백규가 그 어진 아내를 잃고 나서 가난하여 살길이 막막하여, 어린 것들과 계집종 하나, 솥과 그릇, 옷상자와 짐궤짝을 이끌고 강물에 띄어 산골로 들어가려고 상여와 더불어 함께 떠나가니, 내가 새벽에 두포의 배 가운데서 이를 전송하고 통곡하며 돌아왔다.

아아! 누님이 시집가던 날 새벽 화장하던 것이 어제 일만 같구나. 나는 그때 갓 여덟 살이었다. 장난치며 누워 발을 동동 구르며 새 신랑의 말투를 흉내내어 말을 더듬거리며 점잖을 빼니, 누님은 그만 부끄러워 빗을 떨구어 내 이마를 맞추었다. 나는 성나 울면서 먹으로 분을 뒤섞고, 침으로 거울을 더럽혔다. 그러자 누님은 옥오리 금벌 따위의 패물을 꺼내 내게 뇌물로 주면서 울음을 그치게 했었다. 지금에 스물여덟 해 전의 일이다.

말을 세워 강위를 멀리 바라보니, 붉은 명정은 바람에 펄럭거리고 돛대 그림자는 물 위에 꿈틀거렸다.언덕에 이르러 나무를 돌아가더니 가리워져 다시는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강 위 먼산은 검푸른 것이 마치 누님의 쪽진 머리 같고, 강물빛은 누님의 화장거울 같고, 새벽달은 누님의 눈썹처럼 보였다. 빗을 떨어뜨리던 시절을 울면서 생각하니, 어릴 적 일이라서 가장 또렷하게 기억나고, 기쁨과 즐거움이 또한 많았다. 세월이 길다지만 그 사이에 언제나 이별, 근심, 가난이 있어 꿈결처럼 덧없이 지났다. 형제로 지내던 시절이 어찌 그리도 빨리 지나갔던가.


가는 사람은 정녕코 뒷날의 기약을 남겼다지만 보내는 사람의 옷깃을 눈물로 젓게 하였네.
쪽배로 이제 떠나면 언제나 돌아오시려나. 보내는 사람만 외로이 강가에서 발길을 돌리네.



백자증정부인 박씨묘지명 - 연암 박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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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은 조선 정조때의 문인으로 당대 최고의 산문가라고 일컬어지는데 지금에 와서도 연암의 글은 글쓰는 사람의 입에 자주 회자되고
표본이 되기도 한다.

위 글은 연암이 맏누이를 사별하고 쓴 글이다. 연암의 글 중에서도 손꼽히는 명문장이라고 한다.

특히 빨간 글씨의 문장은 읽으면 눈에 그려지는 듯 선명하게 묘사되고 있다.

연암은 친구들의 서문을 많이 써주었는데 서문의 형식을 빌려 자신의 문장론, 즉 옛글을 모범으로 삼으면서 새롭게 창조한다는 法古創新의 글쓰기론을 피력했다.


"저 허공 속에 날고 울고 하는 것이 얼마나 생기가 발랄합니까. 그런데 허무하게도 새 '조(鳥)'라는 한 글자로 뭉뚱그려 표현한다면 채색도 묻혀버리고 모양과 소리도 빠뜨려 버리고 마는 셈입니다."

연암의 「京之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 일부이다.

그는 살아있는 새를 쓰라, 하늘과 땅이 아무리 오래 되었어도 끊임없이 생명을 낳고, 해와 달이 아무리 오래되었어도 그 빛은 날마다 새롭다고 말한다.


연암의 글이 지금까지 조명을 받는 것은 그의 글이 생동감있게 묘사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설명하거나 개입하거나 몰고가지 말고 그냥 보여줘라'이다. 

바로 直敍描寫를 말함인데 연암이 추구했던 글쓰기와 일맥상통한다.

글을 쓸 때는 들려주려고 하지 말고 보여주라고 한다.

보여줘라, 이것은 모든 예술이 추구해야할 바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