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류장에서
문태준
언젠가 내가 이 자리에 두고 간 정류장
둥근 빗방울 속에 그득 괴어 있던 정류장
꽃피고 잎 지고 이틀 사흘 여름 겨울 내려서던 정류장
먼 데 가는 구름더미와 눈보라와 안개의 정류장
홀어머니 머리에 이고 있던 정류장
막버스가 통째로 싣고 간 정류장
- 문태준 산문집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나무가 되지요>> 에 수록된 시
*
정류장이라는 장소는 문태준 시인의 시 속에서 자주 등장한다.
그 시인에게는 깊이 각인된 장소로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는 참 쉽다.
그런데 저런 시를 막상 쓰려면 정말 쓰기 어렵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익숙한 시어지만
그 언어의 조합이 결코 익숙하지 않다.
뻔하지도 않다.
그러나 읽고나면 마음 한 쪽 자리에 눈물이 고이게 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읽을수록 좋은 시
자꾸 읽게 되는 시
정류장에 서있게 되면 저절로 떠올리게 되는 시...
내가 시에 대해 회의를 느끼던 순간, 문태준 시인의 시집을 읽게 되었다.
어떤 시가 옳다 그르다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수용할 수 있는 시, 그러니까 내가 좋아하는 시, 더 나아가 내가 쓰고 싶은 시가
바로 문태준 시인의 시라는 것을 깨달았다.
좋은 시에는 쉬우면서 던져줄 수 있는 그 어떤 것이 있다.
그리고 그 시가 나를 통과할 때 미세하게 떨림을 준다면 나는 좋은시라고 생각한다.
어떤 시는 어떻게 이렇게 썼을까,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하고 감탄하게 하는 시도 있지만
그 감탄의 유효기간은 길지가 않다.
문태준 시인의 시 중에는 오래도록 남아 있는 시들이 꽤 많다.
이미지로, 신선한 언어로, 리듬으로...
그중 <유자>라는 시는 유자를 볼 때마다 떠오른다
쉬우면서도 아름다우면서도 깊은 통찰이 있지 않으면 결코 나올 수 없는 시,
다시 문태준 시인으로 돌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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