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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등에 사슴/ 최서진

kiku929 2022. 10. 26. 17:00

 

손등에 사슴

 

 

최서진

 

 

 

손등에 앉아 있는 사슴

불을  꺼도 사라지지 않는 사슴

긴 속눈썹이 젖어 흔들리는 사슴

 

눈 내리는 꿈을 지나서 사슴은 온다

저녁 하늘의 방향으로

수많은 사슴이 뛰어간다

 

사슴의 이마 위로 폭설이 쏟아진다

 

견딜 수 없이 사슴

저녁처럼 가만히 오는 사슴

까마득히 등이 멀어지는 사슴

희박한 사슴

돌아보면 손등에는 없는 사슴

아홉의 달빛이 박힌 사슴

무성하던 잎들이 숲을 빠져나갈 때 어지러운 사슴

찬 얼룩의 모양으로

외로움으로 사슴은 태어나지

 

약속에 늦지 않도록

깊어진다는 말이 더 깊어지도록

사슴이라는 말이 더 사슴이 되도록

 

이마 위로 뛰어드는 사슴을 만나면

돌이킬 수 없는 비가 내리지

차분히 사슴을 이해하게 되고

우리는 결연하게 사슴으로 달려 나가지

 

손등이 뒤집어지지 않도록

 

 

 

 

 

《시인수첩》 2022년 가을 호 중에서

 

 

 

 

 

*여기서 사슴의 다른 말을 달리 뭐라고 할 수 있을까.

자기 안에 있는 야성을 가진, 그러나 순한 동물 같은 맑은 한 점의 영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늘 가까이에서, 아주 멀어지는 일 없이

늘 사슴으로 향하게 하는,

뭐,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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