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옛 노트에서 / 장석남

kiku929 2010. 1. 16. 12:24

 

                    

 

 

                           

 

   옛 노트에서

 

 

                      장석남

 

 

그때 내 품에는
얼마나 많은 빛들이 있었던가
바람이 풀밭을 스치면
풀밭의 그 수런댐으로 나는
이 세계 바깥까지
얼마나 길게 투명한 개울을
만들 수 있었던가
물 위에 뜨던 그 많은 빛들,
좇아서
긴 시간을 견디어 여기까지 내려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그때는 내 품에 또한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모서리들이
옹색하게 살았던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래 그 옆에서 숨죽일 무렵


*시집<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문학과 지성사

 

 

 

 

 

그때... 한때...

우리를 열뜨게 하던 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나의 열망에 집중하고 그 열망이 낳은 여러 빛깔들이 눈부시듯 점멸하던 시간들...

그 가느다란 떨림, 자잘한 요동들...

손끝에 만져지던 실감어린 생의 기쁨들이 소름돋듯

몸에서, 마음에서 돌기처럼 섬세하게 일어나던 나날들이었습니다.

 

이젠 그 한때도 고개 저 편에 두고온 아련한 불빛같은 것,

기억의 파편들이 스스로의 무게에 제 팔다리를 잘라내던 고통의 시간도

지금은 꿈인듯, 생시인듯 아득히 멉니다.

 

그리운 시간만이 고요히 나를 따라오는 지금 내 품안은

가만가만 귀기울이며 지난 추억을 부화시키고 있는 중,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그 무렵을 향해

홀로 발걸음을 옮기는 하염없는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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