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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낭게의 내밀한 살림 / 장석주

kiku929 2010. 1. 9. 11:10

 

  

                 

 

 

 

 

 엽낭게의 내밀한 살림

 

 

                                장 석주

 

 

 

엽낭게가 꾸리는 살림을

아주 가까이에서 본 적이 있다.

바다 속으로 빠지는 해,

붉은빛을 목도리처럼 휘감은 회색 구름,

남도 내륙의 산들이

엽낭게의 조촐한 살림 내역이다.

그 살림에 비추어 내밀한 것의 규모를

나 혼자 짐작해 보는데

슬픔도 기쁨도 아닌 것이 왈칵, 하고

목구멍을 타고 넘는다.

 

점심 대신에 삶은 감자를 천일염에 찍어

두어 개 먹는다.

혼자 무엇을 먹는다는 건

참으로 쓸쓸한 일인분의 고독이다.

이 정찬은 황홀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삶은 감자와 천일염만 있다면

나, 오동나무에 보랏빛 꽃 필 때

이 세상을 떠나고 싶지 않다.

 

 

[절벽]

 

 

 

병원에서 두달 가까이 있을 때

나의 살림살이는 서랍 한 칸이면 충분했다.

칫솔, 치약, 수건, 스킨, 로션, 빗, 거울, 컵,

삼만원이 넘지 않게 들어있는 지갑, 과도, 손톱깎이, 티스푼...

그만한 살림만 있으면 한 세월 다 살만도 하건만

너무 많은 걸 지니고 있구나 싶었다.

 

난 만원으로 좋은 사람과 밥 한끼 함께 할 수 있고

아이들 먹고 싶은 거 아무 생각없이 사줄 수 있을 때

참 행복하다.

자판기의 커피 한 잔을 손에 쥐고 걸어갈 때도 행복하다.

 

이다음 내가 늙어서 그정도의 돈을 써야할 때

궁색한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만 살았으면 좋겠다.

그럼 나도 시인의 말처럼

이 세상을 떠나고 싶지 않을 것만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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