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낭게의 내밀한 살림
장 석주
엽낭게가 꾸리는 살림을
아주 가까이에서 본 적이 있다.
바다 속으로 빠지는 해,
붉은빛을 목도리처럼 휘감은 회색 구름,
남도 내륙의 산들이
엽낭게의 조촐한 살림 내역이다.
그 살림에 비추어 내밀한 것의 규모를
나 혼자 짐작해 보는데
슬픔도 기쁨도 아닌 것이 왈칵, 하고
목구멍을 타고 넘는다.
점심 대신에 삶은 감자를 천일염에 찍어
두어 개 먹는다.
혼자 무엇을 먹는다는 건
참으로 쓸쓸한 일인분의 고독이다.
이 정찬은 황홀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삶은 감자와 천일염만 있다면
나, 오동나무에 보랏빛 꽃 필 때
이 세상을 떠나고 싶지 않다.
[절벽]
병원에서 두달 가까이 있을 때
나의 살림살이는 서랍 한 칸이면 충분했다.
칫솔, 치약, 수건, 스킨, 로션, 빗, 거울, 컵,
삼만원이 넘지 않게 들어있는 지갑, 과도, 손톱깎이, 티스푼...
그만한 살림만 있으면 한 세월 다 살만도 하건만
너무 많은 걸 지니고 있구나 싶었다.
난 만원으로 좋은 사람과 밥 한끼 함께 할 수 있고
아이들 먹고 싶은 거 아무 생각없이 사줄 수 있을 때
참 행복하다.
자판기의 커피 한 잔을 손에 쥐고 걸어갈 때도 행복하다.
이다음 내가 늙어서 그정도의 돈을 써야할 때
궁색한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만 살았으면 좋겠다.
그럼 나도 시인의 말처럼
이 세상을 떠나고 싶지 않을 것만 같으니까...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가슴에 비가 내리네 /베를레느 (0) | 2010.01.09 |
---|---|
칼과 그림자 / 박이화 (0) | 2010.01.09 |
누군가 창문을 조용히 두드리다 간 밤 / 김경주 (0) | 2010.01.09 |
엄마 걱정 / 기형도 (0) | 2010.01.09 |
빈 집 / 기형도 (0) | 2010.01.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