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은함에 대하여
도종환
은은하다는 말 속에는 아련한 향기가 스미어 있다
은은하다는 말 속에는 살구꽃 위에 내린
맑고 환한 빛이 들어 있다
강물도 저녁 햇살을 안고 천천히 내려 갈 땐
은은하게 몸을 움직인다
달빛도 벌레를 재워주는 나뭇잎 위를 건너갈 땐
은은한 걸음으로 간다
은은한 것들 아래서는 짐승도 순한 얼굴로 돌아온다
봄에 피는 꽃 중에는 은은한 꽃들이 많다
은은함이 강물이 되어 흘러가는 꽃길을 따라
우리 남은 생도 그런 빛깔로 흘러갈 수 있다면
사랑하는 이의 손잡고 은은하게 물들어갈 수 있다면
은은한 것, 잔잔한 것, 스며드는 것, 번지는 것...
나이들수록 이런 것들이 좋아진다.
어떤 것도 해치지 아니하고
자신만의 걸음으로 살포시 다가오는 것들...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은은하게...
만남도 이별도 잔잔하게...
그렇게 내 삶의 일부처럼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소리치지 않고 나를 다녀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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