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눈을 떴다.
조금 뒤척이다가 자는 것을 포기하고 거실에 나왔다.
그리고 아침 먹을 것을 준비하고 딸들과 밥을 먹고 커피 한 잔을 들고 잠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오늘은 2010년 마지막 날.
사실 마지막 날이라고 해서 어제나 내일이나 다를 것은 없겠지만 마음안에 칸을 만들어 정리하게 되고
다짐하게 되는 계기가 되어주니 강물같은 시간에 날짜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이다.
새해에는 어떻게 보낼까.
거창하게 계획을 잡기 보다는 내가 일상에서 실천하며 살 수 있는 것,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것,
그런 것들을 이루며 살고 싶다.
우선은 내가 보다 건강해지도록 노력하고 싶다.
그동안은 너무 등한시해서 살아왔는데 이번에 입원을 하고부터는 내가 보통사람들처럼 똑같이
먹고 생활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췌장은 인슐린을 분비하고 소화액을 내보내는 기관이라서 췌장이 망가지면 모든 소화기능이 떨어지게 되고
당뇨가 생긴다.
외과 수술의 꽃이라는 *휘플 수술을 받고나서는 췌장염의 원인이었던 종양이 제거되었으니 끄떡하면 급성췌장염으로
응급실에 가야했던 고통도 끝이려니 했는데 불행히도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3년이 지난 지금은 수술의 후유증으로 수술부위가 늘어나 췌장관의 협착이 일어나고는 한다.
관의 협착이 일어나면 소화액이 원활하게 분비되지 못하고 관이 막히게 되면서 염증이 일어나고 심한 복통과 더불어 급성췌장염으로 진행된다.
수술 후 두번째 췌장염으로 입원을 했다.
심한 사람은 두세달에 한번씩 입원을 하는 경우도 있고 어떤 사람은 나처럼 췌장암으로 수술을 했는데
나중엔 췌장염으로 사망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인명은 재천이라지만 적어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아서 주위에 고통을 주는 일은 없게 하고 싶다.
어떻게든 나로 인한 피해의 범위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
이것이 내가 바라는 것이다.
내 시계는 하루 열번의 알람이 되어 있다.
밥먹는 시간, 간식 시간, 약먹는 시간...
'먹을 수 있을 때 조심하라'는 말이 가슴에 박힌다.
병원에서 금식하며 치료를 받을 때마다 '먹는다'는 즐거움이 얼마나 크고 소중한지,
먹는 일만큼 일상의 행복을 줄 수 있는 것이 또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난 지금 먹을 수 있다. 그리고 먹을 수 있을 때 조심하면 되는 것이다. (이 얼마나 단순한 이치인가!)
또 한 가지, 새해에는 글을 많이 쓰고 싶다.
글을 쓰는 행위는 내게 지적인 갈증을 느끼게 해준다.
갈증을 느끼게 한다는 것은 욕망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삶에 욕망이 있다는 것처럼 생생한 살아있음이 또 어디에 있을까.
무한대의 갈증, 그리고 무한대의 욕구...
이것은 내가 앞으로 살아가게 될 삶이 지루해지지 않고 보다 윤택해지도록 만들어 줄 것이다.
세상에 가장 강한 사람은 외로움을 이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누구나 외롭고 쓸쓸하고 고독하다.
그것에 함락되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을 난 어쩌면 운좋게도 발견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때로는 현실적인 어려움들을 그나마 덜 어렵게 느끼게 해주는 스스로의 최면이 되어주기도 하면서...
오늘도 날이 많이 차갑다.
오늘 하루는 장을 보고 대청소를 하고 목욕을 하고 아이들과 차분하게 저녁을 맞이할 생각이다.
일 년이라는 시간을 상자속에 넣고 리본으로 고이 묶으며...
2010.12.31
*휘플 수술(Whipple operation):휘플이라는 외과 의사의 이름을 따옴,위의 아랫부분, 총담관, 담낭, 십이지장, 췌장을 절제하는 수술로 췌장, ampulla of vater, 총담관 십이지장의 악성암으로 폐쇄성 황달이 있는 경우에 행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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