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
고은
70년대 대학생에게는
리영희가 아버지였다
그래서 프랑스 신문 '르몽드'는
그를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사상의 은사'라고 썼다
결코 원만하지 않았다
원만하지 않으므로 그 결핍이 아름다웠다
모진 세월이 아니었다면
그 저문 골짜기 찾아들 수 없었다
몇 번이나 맹세하건대
다만 진실에서 시작하여
진실에서 끝나는 일이었다
그의 역정은
냉전시대의 우상을 거부하는 동안
그는 감방 이불에다
어머니의 빈소를 마련하고
구매품 사과와 건빵 차려놓고
관식 받아 차려놓고
불효자는 웁니다
이렇게 세상 떠난 어머니 시신도 만져보지 못한 채
감방에서 울었다 소리죽여
*시집 <만인보> (창작과비평, 1986)
단순 기능적 전문가로서의 '지식인'이 아니라 시대의 고민을 자
신의 고민으로 일체화 시키는 불란서어의 뉘앙스(함의)로서의 intel-
lectuel(-le), 즉 '지성인'에 해당하는 나의 삶의 시간적 구간은 약
50년간이다. 6.25전쟁의 지겹도록 혐오스러운 7년간의 군복무에서
해방되어, 비로소 하나의 자유정신의 인격체로서 1950년대 중엽부
터 언론인과 대학교수, 사회비평가와 국제문제 전문가로서 활동한
현재까지를 말한다. 이 긴 시간에 걸친 나의 삶을 이끌어준 근본이
념은 '자유'(自由)와 '책임'(責任)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더욱이 진
정한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인 까닭에 자기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정에 대해서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존
재하는 '사회'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는 믿음이었다.
이 이념에 따라, 나는 언제나 내 앞에 던져진 현실 상황을 묵인하
거나 회피하거나 또는 상황과의 관계설정을 기권(棄權)으로 얼버무
리는 태도를 '지식인'의 배신(背信)으로 경멸하고 경계했다. 사회에
대한 배신일 뿐 아니라 그에 앞서 자신에 대한 배신이라고 여겨왔
다. 이런 신조로서의 삶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그렇듯이 바
로 그것이 '형벌'(刑罰)이었다.
한 지식인의 삶과 사랑, 대화/ 리영희 (대담.임헌영), 한길사
-읽는 이를 위하여 中-
1929년 평북 삭주군 대관면에서 태어났다. 1957년부터 1964년까지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 1964년부터 1971년까지 조선일보와 합동통신 외신부장을 각각 역임했다. 1960년 미국 노스웨스턴대학 신문대학원에서 연수했다. 1972년부터 한양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 겸 중국문제연구소(이후 중소문제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중 박정희정권에 의해 1976년 해직되어 1980년 3월 복직되었으나, 그해 여름 전두환정권에 의해 다시 해직되었다가 1984년 가을에 다시 복직되었다. 1985년 일본 동경대학 초청으로 사회과학연구소에서 그리고 서독 하이델베르크 소재 독일연방 교회사회과학연구소에서 각기 한학기씩 공동연구에 종사하였다. 1987년 미국 버클리대학의 정식부교수로 초빙되어 'Peace and Conflict' 특별강좌를 맡아 강의하였다. 1995년 한양대학교 교수직에서 정념퇴임한 후 199년까지 동대학 언론정보대학원 대우교수를 역임했다.
저서에 [전환시대의 논리](1974), [우상과 이성](1977), [분단을 넘어서](1984), [80년대의 국제정세와 한반도](1984), [베트남전쟁](1985), [역설의 변증](1987), [역정](1988), [自由人, 자유인](1990), [인간만사 새옹지마](1991),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1994), [스핑크스의 코](1998), [반세기의 신화](1999) 및 일본어로 번역된 [分斷民族の苦惱](1985), [朝鮮半島の新ミレニアム](2000)이 있으며 편역서로는 [8억인과의 대화](1977), [중국백서](1982), [10억인의 나라](1983)가 있다.
1929년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면에서 태어나 삭주 대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냄
1950년 국립해양대학을 졸업한 후 안동중학교에서 영어교사를 지내던 중 6.25 발발로 군에 입대
1957년까지 복무
1957년부터 1964년까지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
1960년 미국 노스웨스턴대 신문대학원 연수
1964년부터 1971년까지 조선일보.합동통신 외신부장 역임
1972년부터 한양대학교 문리대 교수 겸 중국문제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1976년 봄 긴급조치 9호하에서 해직
1980년 봄 복직되었다가 그해 여름 다시 해직
1984년 가을 복직되어 1995년 2월 정년 퇴임
한 인간이 자기의 신념대로 살아간다는 건 리영희교수의 말처럼 형벌인지도 모른다.
자기의 가치관에 따라 행동하며, 그 행동으로 인한 불이익을
감내하면서 책임을 지는 삶은 노블리스 오브리제의 정신과도 상통한다.
사회에서 최소한 자기에게 주어진 몫만큼은 책임질 줄 아는 사람,
그런 사회라면 우린 지금보다 훨씬 밝고 희망적인 꿈을 꿀 수 있지 않을까.
시대의 정신이 뭔지를 몸소 실천하시다 가신, 지성인의 표상이자 우리의 스승이셨던
고 리영희 교수의 삼가 명복을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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