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
-뿌리에게
이승희
당신을 수면 아래 묻고
당신의 이름은 물속의 흙에 묻었습니다.
나는 물 위에 떠서
가만히 당신을 생각합니다.
여전히 한 몸인 당신의
이야기가 오늘 하루의 양식입니다.
난 여전히 당신을 읽고
당신은 여전히 나를 읽습니다.
때로 당신은 자꾸만 나를 밀어 올리려 하지만
난 결코 이 물을 떠나지 못합니다.
저 공중으로 가버릴 수가 없습니다.
수면에 닿은 곳, 여기까지가
내가 당신을 버릴 수 있는 거리입니다.
난 당신으로 인해 꽃 피지만 당신은 나로 인해
당신의 이름을 말할 수 있습니다.
밤이 되어
달빛을 타고 당신에게 내려가
물 속의 흰 방에서 잠들고 싶습니다.
이제 그만 이 꽃잎을 거두어
송이째 당신에게 지고 싶어집니다.
물속
물의 알갱이들을 두드려 밟으며
달빛이 그러하듯
오랫동안
아주 느린
세월의 무게로
가라앉고 싶습니다.
다시는 떠오르지 않고
다시는 저 공중을 그리워하지 않으며
다시는 꽃 피우지 않으며
지고 싶습니다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 창비.2006.
뿌리와 잎 사이의 거리,
그 거리를 영원히 채울 수 없는 사랑은 운명이라고 말해야할까...
연잎이 공중을 그리워하지 않는 일,
나무가 초록을 그리워하지 않는 일은
사람이 사랑을 그리워하지 않는 일과 같은 말.
아무 것도 그리워하지 않는다는 말은
그건 生이 아니라는 말.
생이란 건
끊임없이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오늘도 누군가가 그리운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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