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초원에서
박영근
외줄기, 하얗게 빛나는 길이
느리게 초원을 가다
지평선 속으로 사라진다
하늘에도 바람 속에도 내가 기어 부를 노래는 없다
저 홀로 깊어져 푸르러갈 뿐
바람이 기르는 몇떼의 구름도 이내 흩어진다
그리고 여기, 시간은 있는가
가없는 초원에
한낮에 풀들이 마르고
앉은뱅이 쑥부쟁이는 이미 천년 전에 꽃을 피우고
타는 정적 속에서
말들이 강물을 건너간다
바람소리
바람소리
저 불어오는 바람은 무지 (無知)일 뿐이다
저도 모른 채 돌 하나의 순한 침묵으로 돌아갈 뿐이다
붉은 구름이 밀려가는 저녁으로 돌아가던 낙타가
내가 온 길을 무심히 바라본다
몽골 초원에서 2
박영근
강물은 흐르고
강물은 흐르고
해맑은 물빛으로 웃고 있는 조막돌멩이들
흐르는 대로 나 또한 흐르고 싶다
어디쯤에서 나는 그대와 헤어졌는가
나는 그것조차 모르고,
깨어진 물거울 속에는
시간이 묵어간 집들이
사슬이 되어 서로를 묶고 있다
이제 돌아와 바라보는 테레즈
강물은 흐르고
강물은 흐르고
흔들리는 나뭇잎이 가르치는 대로 나는 바람소리를 듣는다
대지에 드리운 거대한 발자국을 거두고
지평선을 붉게 들어올리고 있는
구름의 저녁 한때를
나는 바라본다
사람이 지어내는 한 점 슬픔도 없이
이제 별이 돋아나리라
모든 길들이 지워진
캄캄 암흑에
나 별자리에 누워 환히 흘러가리라
강물은 흐르고
강물은 흐르고
내 안에 다시 뿌리를 내리고 있는
테레즈강
물소리
물소리
몽골 초원에서 3
박영근
새푸른 하늘은 대낮이다
지평선마저 사라진 초원에서는
사십몇년 묵은 나의 국적도 이름도 자취가 없다
들메뚜기 튀어오르는 소리만이 선명하다
여기서 나의 말(言)은 풀 한포기 흔들지 못한다
헤매는 길이 어디쯤인지 나는 모른다
쑥향기 속에 잠시 몸을 눕힐 수 있을 뿐
어디쯤에서 길을 잃었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풀을 찾아 구름을 넘는 양떼를 따라갈 뿐이다
이제 너를 돌아보지 마라
다비(茶毘)
다비
돌아 갈 곳을 찾던 슬픈 마음이
불꽃 한 점 없이 저를 사르고
까마득한 허공의 새들을 부른다
해맑은 구름이 타는 하늘은 대낮이다
몽골 초원에서 4
박영근
저 노란 꽃들이 어디서 왔는지 나는 묻지 않는다
얼마나 살았는지도
형체도 슬픔도 없다
때가 되면 산 것들은 바람 속으로 돌아간다
무심히
풀씨가 날아와 또다른 꽃을 터트리는 그 첫자리
한낮의 초원이 뜨거운 숨을 들어올려
갓난 구름송이 하나 피워낸다
*시집 <별자리에 누워 흘러가다>
어제 오늘 박영근 시인의 유고 시집을 읽었다.
'유고'라는 말이 앞에 붙게 되면 펼쳐 읽기도 전에 마음이 슬퍼진다.
주인없는 글들이 땅 위에서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들풀인 것만 같아서...
시인은 자신의 말이 풀 한포기도 흔들지 못한다고 했지만
그래도 시인의 언어는 땅을 움켜쥐고 생명을 키우는 뿌리와 같아서
읽는 이의 마음에 풀 한 포기 자라게도 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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