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남자
프랑스,우리들의 사회적 이상이었던 1968년 5월 혁명은 좌절되었고
A와 나는 술집에서 술을 마시며 울었다.
내가 A와 마지막으로 본 날이었다.
그때 우리의 젊음은 원대하고 희망적인 꿈이 있었고 경박하지도 않았으며
다정다감했으므로 우린 그것으로 젊음을 욕되게 하지 않았기에 충분했다.
그 후로 A는 문학을 택했고 난 항해를 택했다.
우리의 이런 미래가 없는 선택은 오랜 세월 집착을 가져왔던 꿈과 위배되지
않는 것으로 우린 생각했던 것일까...
# 편지
25년의 세월이 지난 어느날 내 앞으로 편지 한 통이 배달되었다.
A의 청소부에게서 전달된 편지에는 A의 죽음을 알리며 죽기전 이틀 전에 썼던
편지를 꼭 주인에게 전해야할 것 같다고 했다.
그 안에는 <여보게, 친구>라는 말로 시작되고, 그 말로 멈춰버린 백지 한 장이 전부였다.
그 영영 상실되고만 메세지...
난 A가 굳이 25년간 아무 연락없이 지내던 나에게 자기 삶의 마지막에서 편지를 쓰려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난 친구에 대한 우정의 답으로라도 그 메세지 이후를 재 구성해주고 싶었다.
수단 항구에서 난 그렇게 오랜 세월 잊혀졌던 파리로 왔다.
# 여자, 사랑
A와 사랑을 나누던 여자, A를 배신한 여자, 마침내 A를 죽게 한 여자...
운동화를 즐겨 신었으며 흑백의 옷을 즐겨입었고, 가녀리고 여려보이는 아름답고 젊은 여자.
그 여자에겐 시대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고 오로지 빛나는 현재밖에 없었으며
철학적 혹은 윤리적인 입장도 주의 주장도 없는 그런 시대의 여자였다.
지금의 나에겐 이질적이어서 마치 이방인처럼 지나가게 되는 지금의 파리가 보여주는
상업적이고 화려하고 현대적인 유행의 풍경에 어울리는 여자였던 것이다.
그에 반해 나의 친구 A는 역사와 문학 쪽이 전부인 사람이었다.
나의 친구는 그 여자가 선사하는 젊음과 신선한 세례수에 몸을 적시고 다시 태어날 수 있으리라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각자 자기 나이에 파묻혀 있어 찢어진 살이 서로 합쳐져 하나로 아물기 보다는
더 벌어지고 갈라지는 상처의 양쪽 두 살갗처럼 황량한 고독에 쌓이게 되었던 것이다.
아니, 처음부터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사이였을 것이다.
#배신
여자는 떠났다.
처음 그 여자를 매료시켰던 A의 문학적이고 신비스럽고 이질적인 면이 결국 그녀를 떠나게 한 이유가 되면서...
그녀의 옷가지와 물건들이 하나씩 A의 집에서 사라지고 마침내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을 때
A는 삶의 의욕을 잃고 폐인이 되었다.
그여자를 통해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마지막 희망이 사라진 A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술과 담배, 무기력, 그리고 여자에 대한 집착이었다.
A는 사라진 여자의 빈자리에 몸을 기대어 유령처럼 걸었고 몸이 절반은 뽑혀 나가 버린 사람처럼 보였으며
그 절반의 상실은 앞으로도 영원히 평형을 찾기 어려운 치명적인 것이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었다.
#죽음
A는 죽었다.
그가 죽음을 택한 것은 사라진 여자의 배신이 전부는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여보게, 친구> 이 말이 고작이었지만 그가 죽음을 대면하면서 나에게 편지를 쓰고자 했던 것은
그 오랜 세월 동안 우리를 서로에게 연결시켜주었던 채워지지 않는 갈망, 그 불안정성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며,
평범한 두 단어를 적고 나서 침묵했던 건 그 이유가 매우 복잡한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복잡하지만 침묵의 그 속에는 이 세상에서 나만이 이해해줄 사람이라는
A 나름의 믿음이었다고 여겨진다.
나는 다행히 때이르게 늙어버린데 반해 A는 끝까지 늙은 소년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며
그 때문에 그는 자신을 상실한 것이다.
# 다시 과거에 묻다
이제는 더 이상 역사도 윤리도 나아가 심각하게 말해서 정치도 어찌되든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깨달았다.
그러한 낡은 것들은 회색으로 물들어가는 우리의 머리칼보다도 더 확실하게 낡은 것들이라는 사실을...
더이상 미래는 우리의 전성기가 아니라는 걸...
하지만 우리가 한때 희망이라고 품었던 것에는 연약한 한 식물의 뿌리가 조심스럽게 뽑혀나와
잔 뿌리 하나하나에 흙 알갱이 하나하나가 떨구어지듯이 아름다움을 낳았다.
그것이 유일하게 신의 세계를 향하여 가는 빈약한 증거라 해도 우리는 적어도 그만큼은 이행한 셈이었다.
그것으로 된 것이라고...
"우리 이제 더는 숲에 가지 못하리,
월계수 수풀이 잘렸으니.
그리고 또 오래 전부터 그대를 사랑해,
영원히 잊지 못하리"
# 책장을 덮고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에 오아시스가 있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라고...
그 오아시스의 존재를 믿든 믿지 않든
결과적으로 우리는 어쩌면 영원히 오아시스를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아시스를 믿는 삶과, 부재를 확인한 삶은 얼마나 다른 것인가...
단 1%의 희박한 확률의 믿음이라 해도 그 믿음은 나머지 99%에겐 희망과 빛인 것이다.
누군가에게 믿음을 빼앗는 것은 가장 잔인한 일이며 삶 자체를 앗아가는 일이다.
한 사람을 황량함과 스산한 고독 속으로 영원히 가두어 놓는 일이니...
난 지금도 쿨하고 가벼운 것이 미덕이 되어버린 이 세상 어딘가에
지고지순한, 한 알의 진주알 같은 사랑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세상은 여전히 내겐 아름다운 곳이고 삶은 아름다운 여정이다.
아직은... 그리고 그 믿음이 영원히 깨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2008.11
작가의 말
수단항구는 세상과 사랑하는 여인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을 그린 소설입니다.
사랑의 이야기이기도하고 이별의 이야기 단절의 이야기이기도 하지요
이 소설을 구상하고 집필하면서 내가 염두해 두었던 것은 이 시대와 이제는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
감정 느낌 관념들을 지닌 인물을 그려내는 것이었습니다
실패한 혁명에 대한 미련과 나르시스적인 향수가 이 소설의 동기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역사가 진정으로 우리 삶 속에 파고 들었던 그 시절
유럽의 도덕적 몰락을 다 함께 염려하던 그 시절
살기와 쓰기의 접점을 추구하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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