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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행자 건축, 자동차 건축...

kiku929 2013. 3. 5. 21:54

 

 

 

 

                                                                                                <다음>이미지에서...

 

 

 

19세기에 처음 등장한 자동차가 20세기에 대중화되며서, 거리의 풍경은 변하기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 건물은 주로 인간의 보행속도에 맞추어 계획되었다

사람이 걷는 속도는 빠른 것이 아니어서 천천히 걸으면서 주변의  건물도 천천히 보게 된다.

당연히 건물은 섬세한 디테일에 간판도 작게 만들게 되고, 또한 상점이라면 더욱 친절한 몸짓을 위해

차양막이나 벤치등 스트리트 퍼니처를 제공할 것이다.

자동차의 소음이 없어 거리는 한결 조용하고 건물 밖 가로의 사람과 건물 안의 사람이 직접 소통도 가능하기 때문에

쾌적한 2층에서 거리의 사람과 마주보며 이야기 할 수 있도록 테라스와 데크 등이 발달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사진과 그림으로 남아있는 18~19세기 유럽의 전형적인 풍경이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자동차가 보편화되면서 고작 3~4km/h, 빨라야 5~6km/h이던 인간의 이동속도는

그 열 배 혹은 스무 배로 빨라지고, 그에 따라 거리의 풍경도 변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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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19세기의 유럽 건축들이 보행자의 속도와 시선에 맞춘 건축이자 그림으로 그려 보았을 때 아름다운 건축이라면,

20세기의 미국 건축은 자동차에 맞춘 건축이자 사진으로 찍었을 때 아름다운 것이 특징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일제 강점과 한국전쟁이 끝난 후에 짧은 기간 미군정이 있었고, 그 후 1960~70년대 건축과 도시의 급속한

재건 과정에서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그래서 보행자 건축이 아닌 자동차 건축이 온 도시를 뒤덮게 되고, 결과적으로 서울은 자동차에게만 편리하게 꾸며진 도시,

보행자에게는 불편한 도시가 되고 말았다.

휴가와 방학을 맞이하여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이 그곳의 도시들을 아름답게 기억하는 이유가

보행자 중심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닮은 집, 세상을 담은 집> P296 / 서윤영지음, 서해문집(2012)

 

 

 

 

 

 

 

휴~~

모처럼 긴 글을 옮겼다.

이 뒤로 '비행기 건축'에 대한 설명이 나오지만 생략한다.

 

이 글을 읽으면서 빠르다는 것은 역시 놓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 놓친 부분은 무엇으로도 바꿔치기가 될 수 없다는 것도.

어떤 것이 변화하는데는 현 단계가 제대로 숙성이 되었을 때 다음 단계로 진행이 되는 것이 가장 좋다.

그래야만 놓친 부분으로 인한 부작용이 덜하기 때문이다.

인간을 예로 든다면, 사람은 각각의 성장 단계에 맞는 충분한 경험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하고 다음 단계로

건너뛰게 되면 살아가는 동안, 내내 결핍으로 남아 무의식 속에 자리잡으면서 

인간의 행동을 조정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라 하겠다.

 

지금도 우리들에겐 산업화의 과정에서 경제적인 논리에 밀려 인간이 소외되었던

그 시절에 대한 트라우마가 아직도 남아 있다.

돈앞에서 인격을 포기하는 일, 혹은 포기하기를 강요 당하는 일은 치유되기 어려운 부끄러움으로 남기 때문이다.

모순되게도 그러한 기억은 황금만능주의에 쉽게 빠져들게 만든다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홀대하는 지금의 현상을 그 시대의 트라우마로 인한 결과라고 한다면 지나친 생각일까?

인간의 가치보다 돈이 우위를 점하는 게 자본사회의 속성이라고 해도

우리 사회는 지나치게 노골적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하여간 서울의 거리에 보행자 건축이 없다는 것은 우리 현대사의 씁쓸한 자화상이다.

글쓴이의 말처럼 건축은 '사람을 닮고 세상을 담은' 것이라 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