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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속 '시인의 말' 들 (1)

kiku929 2013. 5. 30. 01:17

 

 

언제쯤 바닥에 아무렇지도 않게 시를 내려놓을 수 있을까.

시에 갇힌 나무와 꽃과 새를 풀어줄 수 있을까.

언제쯤이나 나를 정면에서 배반할 수 있을까.

 

 시인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게 하는 자라고 가끔 생각한다. 그 일이 비록 헛것이라 해도

괜찮다.

소리로 그물을 짜는 이 작업이야말고 헛것에 복무하는 일이므로.

 -부분-

 

2004년 9월 안도현

 

*안도현 시집 /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창비시선

 

 

 

 

 

 

 정지용 시론에 이런 구절이 있다.

"안으로 열(熱)하고 겉으로 서늘옵기란 일종의 생리를 압복 시키는

노릇이기에 심히 어렵다. 그러나 시의 위의 (威儀)는 겉으로 서늘옵기를

바라서 마지않는다." 이 말처럼, 눈물을 다스리는 힘이 없이 슬픔을 제대로

노래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울음을 터뜨리려는 힘과 울지 않으려는 힘의 팽팽한 긴장.

겉으로 서늘한 듯하면서 안으로는 뜨거운 슬픔의 샘에서 길어 올려진

진폭과 파동을 지닌 언어.

시의 위의란 그런 내면의 싸움을 통과한 언어에 의해

얻어질 수 있는 것이리라. -부분-

 

*나희덕 시집/ 그곳이 멀지 않다, 문학동네

 

 

 

 

 

 

 

가로 쳐진 철조망 사이로 냇물이 흘러간다.

지푸라기, 나뭇잎, 허섭쓰레기 철조망에 걸쳐놓고

내 말도 그렇게 흘러갈 수 있을까.

그렇게 흘러서 벌판을 건널 수 있을까.

 

한 시인이 말했다.

시는 그리움의 소멸이라고, 비정하라고.

내 그리움이 소멸하는 순간을,

이파리 주민등록증 내밀어

여기 붙잡아 둔다. 네번째 시집이다.

 

*최정례 시집 / 레바논 감정, 문학과 지성사 ,2006

         

 

 

 

 

 

 

시인에게 시집은 십자가다.

그 시집에는 대못이 아니라

자잘한 못들이 무수히 박히고

박혔다 빠지고 다시 박힌다.

 

어느새 열번째 십자가를 지고

눈이 내리는 은현리 들판에 섰다.

 

오직 하나의 대못으로

나를 못 박고 그대를 못 박는

시인의 십자가를 꿈꾸며.

 

2009년 새해 새봄에

은현리 청솔당에서

정일근

 

*정일근 시집/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문학과 지성사

 

 

 

 

 

 

아들이 시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수술 전 자궁의 3분의 1만이

도 남겨달라며 의사를 붙잡고 울던 어머니가 생각난다. 비근한 삶에

그래도 무겁다고 해야 할, 첫 시집을 이제 잠든 당신의 머리맡에 조용히

놓을 수 있을 것 같다.

초대받은 적도 없고 초대할 생각도 없는 나의 창(窓).

사람들아, 이것은 기형 (畸形)에 관한 얘기다. -부분-

 

2006년 여름

김경주

 

*김경주 시집 /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랜덤하우스

 

 

 

 

 

 

 이전에 삶이란 과거가 만들어낸, 견뎌야 할 어떤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제 더이상 과거가 미래를 만들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는

들뢰즈의 말처럼, 기억의 되새김질보다는 생성의 순간에 몸을 맡기고 싶다.

 오늘도 봄그늘에 앉아 기다린다, 또다른 나를.  -부분-

 

2009년 봄

나희덕

 

*나희덕 시집/ 야생사과, 창비시선

 

 

 

 

 

 

내 시는 나를 가련히 여긴 어떤 이가 기별도 없이

보내준 소포 같은 것이다.  -부분-

 

*문동만 시집 / 그네, 창비시선

 

 

 

 

 

 

 그사이, 추억은 세간을 버렸고 꿈은 두번째 이사를 했다.

다시는 가닿을 수 없는 곳. 언젠가는 밤새 건너야 할 그 여백이

나를 온통 채울 것이므로, 대를 쪼개 뗏목을 짓듯 지나간

주소를 적어둔다.

 아픔을 잃었을 때가 정작 마음이 병든 때라는 것을 말기가 되어서야

깨달았다. 더는 무엇에도 울지 않는 몸에 사랑은 왕진하듯 다녀갔다.

그때마다 하늘의 환한 구멍이 까맣게 새들을 삼키는 것을 보았다.

 늘 머물 곳이 마땅찮았던 노모 슬픔에 못 하나 파고 싶다.

그 위에 떠나니는 밤들. 슬픔이 하얀 독처럼 온전히 슬픔으로만

깊어지기를, 거울 속에서도 얼굴을 찾지 못해

바람은 마음을 절며 다녔다.

 

2007년 8월

신용목

 

*신용목 시집 /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창비

 

 

 

 

 

 

 나는 이미 오늘이 아니다. 그러나 오간 데만 오간 것들과

한 것만 또 한 것들, 여기의 시간이다. 삶보다 빨리 달려가는

말(언어)들의 시간이다.

 여기 너머의 사랑이다. 돈돈돈스스스돈돈돈 타전을 기다리는 중이다.

나뭇가지 끝에 걸린 미래의 별이나 이름을 빼앗긴 과거의 명왕성에게도

나의 사랑을 전해다오.

 내 것이 아니었던 내 것들과 결코 내 것이 아닐 내 것들을 향해

다시 꿈꿀 것이다. 한 글자의 이름을 가진 막막한 사물들에게도

안부 전해다오.

 여기에서 모든 여기 너머로 다리를 놓는다. 허밍의 너일까.

너를 따라 이 삶을 통과하고 있다.

나는 너를 그렇게 시라고 부른다.

 

2008년 가을

정끝별

 

*정끝별 시집/ 와락. 창비

 

 

 

 

 

 

 두번째 시집이다. 첫 시집과 두번째 시집 사이, 그래도 따뜻한

시절을 지났다. 설명할 수 없는 날들을 보냈다.

그 시간 동안 몇사람에게 마음을 돌렸고 몇사람하곤 가까워졌다.

원하는 그림의 틀이 뒤틀리기도 했다.

 하지만 더 많은 시간만큼이나 사람을 얻으려 하지 말며

사람을 이기려고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나는 그 시간들을 감히 세월이라고 부르겠다.

 

2006년 11월

이병률

 

*이병률 시집/ 바람의 사생활, 창비

 

 

 

 

 

 

 봄이 온다는 것은 누군가 흔들어 깨워 준다는 것이다.

잠들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을, 잠들어서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을 누군가

깨워서 이제 존재하는 것으로, 의미를 갖는 것으로 살아 있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부분-

 

 2003년 어느 날

 

 *오세영 시집 / 하늘의 시, 현대시 밀레니엄 시집 10

 

 

     

 

 

                힘든 시간들…… 기댈 수 없는

   말들로 이루어진 시에 기댔다.

   골똘하게 시를 바라보고 있을 때

   나는 사라지고 이상하게도 타인의

   낯선 눈으로 사라진 나를 바라보는

   말들이 있었다.

 

   2009년 6월

   채호기

     
*채호기 시집 /손가락이 뜨겁다.문학과 지성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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