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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속 '시인의 말'들 (2)

kiku929 2013. 5. 30. 01:18

 

 

 

문: 문 열고 들어가도 될까요?

답: 그래요. 그대신 문을 돌로 막아버려요.

 

문: 나가고 싶은데 문은 어디죠?

답: 당신!

 

   무너질 데라고는 나 자신뿐!

   거길 깨고 나갈 밖에.

 

   나갈 문도 없이 집을 짓는다. 그게

             사랑이다.

           (그리고 능청이다.

             삶, 말이다.)

 

     2005년 여름

     장석남

 

 *장석남 시집 /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 문학과 지성사

 

 

 

 

 

 

시 생각만 하다가 무엇인가 놓쳤다

놓친 것이 있어

시 생각만 했다

시 생각만 하다가 무엇인가 잊었다

잊은 것이 있어

시 생각만 했다

시 생각만 하다가 세상에 시달릴 힘이 생겼다

생긴 힘이 있어

시 생각만 했다

그토록 믿어왔던 시

오늘은 그만 내 일생이 되었다. 살아봐야 겠다.

 

2005년 4월

천양희

 

*천양희 시집 / 너무 많은 입 . 창비시선

 

 

 

 

 

 

 

 지난 세월 씌어진 것들을 하나의 플롯으로

엮어 읽으면서, 해묵은 강박관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 길은 돌아나올 수 없는 길, 시는 스스로 만든 뱀이니

어서 시의 독이 온몸에 퍼졌으면 좋겠다. 참으로 곤혹스런 것은

곤혹의 지지부진이다.

 

2003년 6월

이성복

 

*이성복 시집 / 아, 입이 없는 것들. 문학과 지성 시인선

 

 

 

 

 

 

 

 

북한강가로 이사온 뒤에 쓴 시들을 묶는다.

많은 시들이 아직도 금강상류에서 머물던 시기의 감회와,

감회 어린 이름들을 거느리고 있다.

이때의 '거느리고'는 '잊지 못하고'가 될 것이다.

나라는 사람은 늘 적응 속도가 느리다.

'가을이다'말하고 나면 가을은 어느새 가버리고 없다.

 

2005년 봄

최하림

 

*최하림 시집/ 때로는 네가 보이지 않는다, 문예중앙시선

 

 

 

 

 

 

 

 

아버지가 그랬다,

시란 쓸모없는 짓이라고.

 

어느날 아버지가 다시 말했다.

기왕이면 시작했으니 최선을 다해보라고.

 

쓸모없는 짓에 최선을 다하는 것,

이게 나의 슬픔이고 나를 버티게 한 힘이다.

 

2006년 늦봄

손택수

 

*손택수 시집 /목련 전차 , 창비

 

 

 

 

 

 

 

 

 내 가슴속에 남은 불씨들을 지펴, 혹은 서늘한 얼음덩이를

녹여 문자로 복원하며 나는 다시 시인이 되었다. 축복인지

저주인지 모를 투명함에 대한 나의 열정을 확인하며, 애매모호

한 정확함. 그게 詩이며 문학이 아니던가. 정확한 문장이

아름답다고, 옳은 문장은 세상을 바꾸는 힘이 있다고 나는

아직도 믿는다. -부분-

 

2009년 봄이 오는 봄내에서,

최영미

 

*최영미 시집 / 도착하지 않은 삶, 문학동네

 

 

 

 

 

 

 

 

 컴퓨터로 시를 찍다가, 오랫만에 볼펜으로

또박또박 시를 옮겨보았다. 가운데 손가락

끝, 펜혹이 부풀어 올랐다.

 

  일소는 멍에터로 떳떳하게 하늘을 우러르고

작가는 펜혹으로, 구부려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씻거늘, 그간 손가락이 물러 진 것이다. 저

린 손을 주무르자 설해목처럼 우두둑거린다.

 

  시집 다섯 권에서 열 편씩 뽑아 역순으로 묶었다.

다음에 몇 권의 시집을 더하면「나무」나「어머니」

만으로 역어보고 싶다. 요번 선집은 전적으로 내

애정에 기댔다.

 

  늘어놓고 보니 지난 십수 년의 곳간이 헛헛하다.

펜혹이 불콰하게 날 올려다보는 늦가을 저녁이다.

또 한 잔의 秋露가 차고 맑다.

 

                  한사랑(寒沙廊)에서

                  이 정 록 삼가

 

*이정록 육필시집/가슴이 시리다 ,2009. 지만지

 

 

 

 

 


 

 한 짐 가득 지게를 진 아버지가

 굴을 빠져나와서 혹은 길가 비석 앞에서

 지게를 진 채 한쪽 무릎을 세워 앉아

 잠시 잠깐 가쁜 숨을 고르시던 게 생각난다.

 

 시집을 내자고 여기 숨을 고르며 앉아 있는 나여.

 너는 얼마나 고되게 왔는가.

 

 아버지께 이 시집을 바친다. -부분-

 

                    2008년 여름

                          문태준

                                 

*문태준 시집/그늘의 발달,2008 ,문학과 지성사

 

 

 

 

 

 

 

또 이렇게 수면에

물결을 새기려 대들었구나.

 

물속을 헤집다가

뒤를 돌아보는 오리처럼

물소리를 움켜쥐었다가 놓는 물갈퀴처럼

 

후회는 늘 막차를 타고 오고,

 

풍경이 아려서

나도 아프다.

 

2008년 1월

      안도현

 

*안도현 시집/간절하게 참 철없이,창비, 2008

 

 

 

 

 

 

 

 

역시

시로 적은 것 말고는

하잘것 없다

추려봐도

부스러기뿐이다

구태여

적지 않는다

 

이 시집을 내기까지

걱정하고

손 잡아준 분들이 있다

사람의 정이

이리

가슴 저리다

 

2007년 1월

위선환

 

*위선환 시집/새떼를 베끼다, 문학과 지성사,2007

 

 

 

 

 

 

 

 

 

 

오랫동안 말들은

 

그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했다.

 

찬사와 영광은

 

항상 멀리 있거나

 

우연히 뒤에서 오는 법.

 

너무 앞서 걸어본 적도

 

자살을 꿈꿔보지도 못한 나는

 

다만 저 불확실한 생의 순간들을

 

기록했을 뿐이다.

 

이제 운명에 대하여,

 

믿음이 만드는 헛것들 앞에

 

내내 피로했던 나는

 

홀연히 자유로워질 수 있겠다.

 

2006년 봄

여태천

 

*여태천 시집 / 국외자들,랜덤하우스코리아

 

 

 

 

 

초판 自序

 

고통을 발음하는 것조차 소란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것이 안으로 안으로 타올라 한 줌의 재로 남겨지는 순간을 기다려

시를 쓰려고 했다.

그러나 내가 얻은 것은 침묵의 순연한 재가 아니었다.

끝내 절규도 침묵도 되지 못한 언어들을 여기 묶는다.

이 잔해들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의 소음 속으로

돌아갈 운명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희덕 시집 / 그곳이 멀지 않다, 문학동네

 

 

 

 

 

 

自序

 

촉촉한

 

비에 젖은 돌같이

촉촉한 세상

 

구멍이 알차게 많은

구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세상

 

부서져 바스락거리는 生이

촉촉이 스며들어가서

잠들고 싶은

다시 태어나고 싶은

 

*최서림시집 / 구멍, 세계사, 2006

 

 

 

 

 

 

 

自序

 

폐교 운동장 구석,

서녘 하늘로 기운 태양에 아직 달아 있는 몽돌 하나

어디에서 와서 그 어색한 자리에 앉아 있는 걸까

홀로 품으려 애쓰는 자리, 혼자 바다를 그리워하는 자리

 

내게 시는 연민에서 출발한 사물 이해법

그것이 사물을 보게 한, 또는 보이게 한 시력이다

내 시 속에 늘 오도카니 있는 존재들,

그 외딴 것들이 느끼는

아주 붉은 현기증

 

2009년 3월

천수호

 

*천수호 시집/ 아주 붉은 현기증, 민음사

 

 

 

 

 

 

 

시집을 펼칠 때마다 내 눈길이 처음 닿는 곳은 시인들의 서문이다.

시보다 더욱 시적인 글,

쉽게 쓰여지는 시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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