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비
오탁번
수수밭 김매던 계집이 솔개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마침 굴비장수가 지나갔다
- 굴비 사려, 굴비! 아주머니, 굴비 사요
-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메기수염을 한 굴비장수가
뙤약볕 들녘을 휘 둘러보았다
- 그거 한 번 하면 한 마리 주겠소
가난한 계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품 팔러 간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올랐다
- 웬 굴비여?
계집은 수수밭 고랑에서 굴비 잡은 이야기를 했다
사내는 굴비를 맛있게 먹고 나서 말했다
- 앞으로는 절대 하지 마!
수수밭 이랑에는 수수 이삭 아직 패지도 않았지만
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녘까지
사내와 계집은
풍년을 기원하며 수수방아를 찧었다
며칠 후 굴비장수가 다시 마을에 나타났다
그날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또 올랐다
- 또 웬 굴비여?
계집이 굴비를 발라주며 말했다
- 앞으로는 안 했어요
사내는 계집을 끌어안고 목이 메었다
개똥벌레들이 밤새도록
사랑의 등 깜박이며 날아다니고
베짱이들도 밤이슬 마시며 노래 불렀다
참, 에로틱한 시다.
하지만 시를 읽고 나선 가슴이 아리다.
이 시가 문학이 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성애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니라 삶의 팍팍함, 고단함이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삶이란 것은 그 무엇에도 우위에 있다는 사실 그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우리네 현실이기도 하다.
어떻게 해서라도 굴비를 남편의 상에 올리고 싶었던 아내의 마음과,
그 굴비가 어떻게 상에 올라왔는지 알면서도 맛있게 먹는 남편의 모습에서
오히려 산다는 일에 가슴 짠한 연민이 느껴진다.
수수밭이라는 거칠고 황량한 배경은 바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곳이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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