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동사서독 중에서
낙타
이상국
새벽 세 시에 일어나<동사서독(東邪西毒)>을 본다
보아도 서로 모른다
남자들은 칼을 맞으면서도
왜 사랑을 놓지 않는지
집은 낡았으나 자식들은 어리다
영화 속의 한 젊은이가 고향을 떠나며
날이 새면 또 내일이 오늘을 이긴다니
그쪽으로 아내의 꿈길을 고쳐준다
누구나 잠잘 땐 가엾은 것이다
나도 깨끗한 물에 얼굴을 비춰보고 싶다
나는 한이 없는 사람이다
그래도 술을 마시고 시를 짓는다
불러야 할 노래가 있어서다
돌아갈 곳이 없으면 사랑이 보인다지만
사랑이 끝내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모래바람 새벽으로 내가
가시나무처럼 깨어 있는 것은
생이 불구이기 때문이다
복사꽃 피는 고향을 떠난 지 오래되었으나
나는 아직 이름조차 얻지 못하였다
세상엔 날 알아보는 사람이 없고
봄이 와도 돌아가지 못하는 옛집엔
이미 모르는 사람이 사는데
비디오가 끝나고 새벽 어디선가 낙타가 운다
*<제2회 박재삼문학상 수상시집>, 실천문학사, 2013.
*
동사서독,
내가 좋아하는 영화중 하나이다.
거칠고 황량하고, 꿈을 찾아 방황하는 사람들의 모습. 그러나 삶의 피로로 가득하다.
예전 한 때 왕가위 감독을 좋아해서 그 감독의 영화를 모조리 본 적이 있다.
아마도 내가 좋아하는 이유라면 작품성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고
다만 화면 전체 가득한 쓸쓸함이 좋아서일지도 모른다.
난 '쓸쓸하다'는 감정은 외롭다든가 고독하다든가 하는 감정보다 더 인간의 본질적인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인간을 외로운 존재, 홀로의 존재라기보다는 '쓸쓸한 존재'라고 말하고 싶다.
왕가위 감독의 작품엔 인간들의 쓸쓸함이 절묘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그 쓸쓸함은 터치할 수 없는 관념적인 느낌으로 전해져온다.
**
시에서 '돌아갈 곳이 없으면 사랑이 보인다'는 구절이 가슴에 탁 안긴다.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의 사랑과 없는 사람의 사랑이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사랑은 가변적일 수밖에 없다.
사랑은 상대에 따라서 변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 의해서 늘 변한다.
늘 요동치는 마음을 따라 출렁이면서...
우린 서로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각자 자신의 사랑 속에서 홀로 사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잊으려고 노력할수록 더욱 선명하게 기억난다.
갖지는 못하더라도 잊지는 말자
-영화 속 대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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