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감정의 쓸모
이 병률
1
조금만 천천히 늙어가자 하였잖아요. 그러기 위해 발걸음도 늦추가 하였어요. 허나 모든 것은 뜻대로 되질 않아 등뼈에는 흰 꽃을 피워야 하고
지고 마는 그 흰 꽃을 지켜보아야하는 무렵도 와요 다음번엔 태어나도 먼지를 좀 덜 일으키자 해요 모든 것을 넓히지 못한다 하더라도 말이에요
한번 스친 손끝
당신은 가지를 입에 물고 나는 새
햇빛의 경계를 허물더라도
나는 제자리에서만 당신 위를 가로 질러 날아가는 하나의 무의미예요
나는 새를 보며 놓치지 않으려고 몸 달아하고 새가 어디까지 가는지 그토록 마음이 쓰여요 새는 며칠째 무의미를 가로질러 도착한 곳에 가지를 날라 놓고 가지는 보란 듯 쌓여 무의미의 마을을 이루어요 내 바깥의 주인이 돼버린 당신이 다음 생에도 다시 새(鳥)로 태어난다는 언질을 받았거든요 의미는 가까이 말아요 무의미를 밀봉한 주머니를 물어다 종소리를 만들어요 내가 듣지 못하게 아무 소리도 없는 종소리를
2
한 서점 직원이 시인을 사랑했다
그에게 밥을 지어 곯은 배를 채워주고 그의 옆자리를 지키는 것만으로 살아지겠다 싶었다
바닷가 마을 그의 집을 찾아가 잠긴 문을 꿈처럼 가만히 두드리기도 하였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를 문장으로 문장으로 스치다가도 눈물이 나 그가 아니면 안되겠다 하였다
사랑하였다
무의미였다
고양이 감정의 쓸모
- 무의미의 의미를 역설적으로 말하다.
이병률 시인의 <고양이 감정의 쓸모>를 읽으면 <8월의 크리스마스>라는 영화가 생각이 난다. 사진관을 운영하는 주인공인 남자는 주정차 단속반인 그녀를 사랑하지만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마지막까지 자신의 감정을 전하지 않는다. 결국 남자는 죽게 되고 여자는 그런 사실을 아무것도 모른 채 여느때와 다름없이 살아간다. 영화는 여기에서 끝이 난다.
이 시는 두 단락으로 나뉘어지는데 이 영화가 시의 첫번째 단락에 어울리는 스토리라면, 두 번째 단락은 한 세대가 흐른 후 두 남녀가 환생하여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또 다시 만나게 되는 영화의 속편을 보는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이 시에서 첫번째 단락은 일인칭 화법으로 독백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것은 닿을 수는 없지만 사랑하는 이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와도 같고, 유서와도 같다.
1연은 아무리 늦추려 해도 늦출 수 없는 세월앞의 무기력한 존재임을, 언젠가는 한 줌 훍이 되어 무덤에는 꽃이 피고, 누군가는 무심히 그 꽃을 바라보는 세월의 무구함을 표현하고 있다 . 그리고 다음번에 태어나면 "넓히지 못한다 하더라도" " 먼지를 덜 일으키'는, 낮은 자세로 있는듯 없는듯 살아가리라 다짐한다. 확장은 옆의 무언가를 침범하지 않고는 얻어질 수 있는 결과물이므로.
2연은 당신과 나의 인연의 한계를 말한다. 당신을 "가지를 입에 물고 나는 새"로 비유하고 있다면 화자는 그걸 바라보는 고양이다. 얼마전 나는 고양이를 집에서 며칠 키운 적이 있는데, 고양이가 깨어있는 동안 집안해서 주로 하는 일은 창밖을 하염없이 내다보는 것이었다. 상상하건데 어쩌면 그 순간 고양이는 자유롭게 날아가는 새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안과 밖의 "햇빛의 경계를 허물더라도" 고양이에게 새는 제 자리에서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밖의 존재에 불과하다. 그리고 무엇과도 소통되지 못하는 그러한 감정은 무의미한 것이라고 화자는 단정한다.
3연은 무의미한 나(고양이)의 시선을 가로질러 새는 가지를 날라 쌓아 놓고, 그것은 무의미의 마을을 이루게 된다. 새 자신도 모르는 소통의 부재는 다른 공간에서 이렇게나마 형체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화자는 "의미는 가까이 말"라고 말하면서 "무의미를 밀봉한 주머리를 물어다 종소리를 만들"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 종소리는 "아무 소리도 없"어야 한다고 한다. 어찌하여 화자는 의미를 가까이 말라고 했을까. 고양이와 새의 관계는 원초적으로 소통할 수 없는 관계이며, 따라서 고양이가 새를 사랑하는 일은 무의미한 것이 된다. 하지만 무의미는 말처럼 아무런 의미 없음이 아니라 의미로서는 설명이 안 되는 의식 너머의 세계를 말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무의미한 것을 의미로써 애써 해석하려 들지 말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소리가 없는 종소리 역시 모순이 된다. 그것은 없는 것과 다름없는 무용지물에 불과하며 그 또한 무의미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종소리를 만들어달라는 것은 무의미하지만 무의미한대로 자신의 사랑에 의미를 찾으려는 안타까운 바람이 담겨 있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그것은 다음 생에 한 시인의 시로 거듭 태어나리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두번째 단락은 첫번째 단락의 시간을 현재로 이동시킨다.
서점 직원이 시인을 사랑한다. 그것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를. 그러나 전생에 밀봉한 주머니(시의 언어)를 물어다 소리없는 종소리(시집)를 만들어달라는 고양이의 소망 그대로 서점 직원은 잠긴 문 앞에서 시인의 문장으로서만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사랑은 "무의미였다"고 말한다. 이미 그녀가 시인을 사랑하는 일은 이 세상에 속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통되지 못한 사랑의 감정은 전생에서 무의미의 마을을 이루었듯, 이 생에서는 한 권의 시의 마을(詩集)로 환생된다. 무의식은 이처럼 거듭 다른 모습으로 다음 생에 이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로 이것이 시의 제목처럼 "고양이 감정의 쓸모"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병률 시인의 매력이라면 친숙한 언어를 문장에 낯설게 배치시킴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효과는 시인이 의도한 그 이상으로 독자들에게 제 각각의 해석을 하도록 유도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이병률 시인만의 두드러진 개성이라 할지라도 너무 자주 쓰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간혹 들기도 한다.
2013년 12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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